본문 바로가기

여적

[여적] 반성의 조건 관우가 명의 화타에게 수술을 받는다. 전투 중 팔에 독화살을 맞은 관우의 상처가 깊어 살을 도려내고 뼈를 긁어내는 수술을 해야 했다. 화타는 고통에 몸부림칠 것에 대비해 환자의 몸을 묶으려 했으나 관우는 괜찮다며 수술을 시킨다. 대신 관우는 측근 마량을 불러 바둑을 둔다. 화타의 이마엔 땀이 흘렀고 막사엔 낭자한 유혈 속에 뼈를 긁어내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관우는 태연히 바둑에 열중했다. 삼국지의 유명한 진중(陣中) 수술 장면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이다. 마취도 없이 뼈를 깎는 수술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화타가 실제론 마비산(痲沸散)이란 마취제를 썼다는 말도 있다. 이 고사를 꺼낸 건 ‘뼈를 깎는 반성’이란 유래는 알 수 없되 유구한 세월 사용된 표현에 대해 얘기하기 위해서다. 반성 .. 더보기
[여적] 문·사·철과 청년실업  박재완 고용노동부 장관이 며칠 전 높은 청년실업률에 대해 뜬금없이 ‘문(文)·사(史)·철(哲) 과잉공급론’을 폈다고 한다. 그는 “반도체나 휴대전화 공장에선 인력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청년실업률이 높은 것은 대학에서의 문사철 과잉공급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즉 청년실업 문제는 수요와 공급의 미스매치(불일치)에 의한 것이지, 기업의 일자리 수요 자체는 아주 많다는 것이다. 이 말을 한 곳은 기자들과의 회식 자리였던 만큼 공식적 발언은 아니다. 그러나 문학·사학·철학, 다시 말해 인문학 전공자 과잉공급이 청년실업률을 높이고 있다는 분석은 상당히 새로운 접근이며, 그것이 다른 사람도 아닌 이 문제 주무장관 입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살펴볼 이유가 충분히 있다. 박 장관이 때아닌 문사철 논란을 제공한 셈이다. .. 더보기
[여적] 독사과 만평   숲에서 백설공주가 마녀와 만난 장면이다. 공주는 사과 광주리를 들고 있는 마녀에게 묻는다. “잠깐만요. 일본에서 오셨나요?” 공주는 손에 든 돋보기로 사과를 살피던 중이었다. 다른 손엔 신문을 들고 있는데 ‘일본 방사능’이라는 제목이 보인다. 며칠 전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IHT)에 실린 만평이다. 첫눈에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일본산 식품이 방사성물질에 오염돼 있을 가능성을 풍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IHT는 뉴욕타임스가 발행해 전 세계에서 발매되는 유력 영자신문이다. 이 신문이 일본 식품을 독사과에 빗댄 건 일본으로선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너무나 유명한 이 동화 속에서 백설공주는 독사과를 먹고 죽음에 이른다. 비록 세태를 풍자하는 만평이라고는 해도 너무했다고 느꼈을 수 있다. 뉴욕 주재 .. 더보기
[여적]민족, 국민 언제부턴지 ‘국민’이란 말이 남용되고 있다. 국민 여동생, 국민 남동생, 국민 오빠, 국민 가수 등 인기를 끄는 사람이나 유행하는 사물 앞에 걸핏하면 국민을 갖다붙인다. 그야말로 국민이 ‘국민 접두어’가 돼버린 격이라고 할까. 배우, MC, 감독, 마라토너, 요정(妖精), 심지어 약골(弱骨)까지 ‘국민○○’의 용례는 무궁무진하다. 이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지만 MBC의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 의 ‘국민투표’ 표현은 좀 심각하다. 이 프로그램은 참가자들에 대한 시청자들의 평가를 묻는 문자투표에 ‘국민투표’란 거창한 이름을 붙였다. 진행자는 여러 차례 시청자들에게 국민투표에 참여할 것을 독려한다. 방송사 측은 “여러분의 위대한 국민투표로 의 주인공이 결정된다”고 선전한다. 이 투표에 굳이 국민이란 수식어를.. 더보기
[여적] 밥 딜런 1960~70년대에 까까머리 중·고교 시절을 보낸 사람들 가운데는 미국 가수 밥 딜런의 추억을 간직한 이들이 꽤 있을 거다. 추억이래야 대단할 것도 없다. 당시  유행한 통기타를 퉁기며 딜런의 노래 ‘블로잉 인 더 윈드’를 흥얼거린 정도다. ‘블로잉 인 더 윈드’는 대표적인 반전가요로 꼽혔다. ‘바람만이 아는 대답’으로 번역된 이 노랫말엔 철학적 성찰이 담겨 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사람으로 불릴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포탄이 날아야/ 영원히 금지될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너무나 많은 사람이 희생됐음을 알까…” 딜런은 이런 질문을 던진 후 “친구여, 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다네”라고 자답한다. 이 곡은 포크계의 여왕으로 불린 존 바에즈의 ‘도나도나’와 함께 미국의 베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