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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민족, 국민

언제부턴지 ‘국민’이란 말이 남용되고 있다. 국민 여동생, 국민 남동생, 국민 오빠, 국민 가수 등 인기를 끄는 사람이나 유행하는 사물 앞에 걸핏하면 국민을 갖다붙인다. 그야말로 국민이 ‘국민 접두어’가 돼버린 격이라고 할까. 배우, MC, 감독, 마라토너, 요정(妖精), 심지어 약골(弱骨)까지 ‘국민○○’의 용례는 무궁무진하다.
 
이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지만 MBC의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의 ‘국민투표’ 표현은 좀 심각하다. 이 프로그램은 참가자들에 대한 시청자들의 평가를 묻는 문자투표에 ‘국민투표’란 거창한 이름을 붙였다. 진행자는 여러 차례 시청자들에게 국민투표에 참여할 것을 독려한다. 방송사 측은 “여러분의 위대한 국민투표로 <위대한 탄생>의 주인공이 결정된다”고 선전한다. 이 투표에 굳이 국민이란 수식어를 동원해야 했는지 의문이다.

참고로 이 프로그램에 모티브를 준 미국 폭스TV의 <아메리칸 아이돌>은 100% 온라인 투표로 우승자를 가려낸다. 수천만명이 투표에 참여한다. 하지만 거기에 ‘국민’ 같은 촌스러운 수식어는 붙이지 않는다. 그런데 TV 시청자 평가를 국민투표로 명명한 원조는 <위대한 탄생>이 아니라 케이블TV 엠넷의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다. <슈퍼스타K>는 ‘대(對) 국민투표’란 것을 통해 우승자를 가렸다. 이 우스꽝스러운 국민투표란 명칭은 시청자 투표나 다른 적당한 말로 바꾸는 게 옳다고 본다. 

국방부가 사병과 장교가 입대·임관할 때 하는 선서에서 ‘민족’이란 말을 ‘국민’으로 바꾸기로 했다고 한다. 대통령령인 군인복무규율 5조를 개정해 “대한민국의 군인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중 ‘국가와 민족’을 ‘국가와 국민’으로 고친다는 것이다. 20년 만의 개정이다. 다문화사회로 이행하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다문화가정 증가에 따라 혼혈인의 현역 복무가 늘고 있는데 ‘민족’이란 표현이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배타성이 묻어 있는 민족보다는 국민이란 중립적이고 포괄적인 표현을 쓰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오랜 세월 단일민족 한국 사회에서 민족과 국민은 동의어로 사용돼 왔다. 그런데 군 입영선서에서 민족을 국민으로 바꾼다 함은 한국 사회가 거대한 변혁을 맞고 있다는 증거이며, 군이 이를 적극 수용한 것으로 평가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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