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마지막 판자촌 서울에 판자촌이 등장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의 일이다. 생계거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이 청계천변에 판잣집을 짓기 시작해 천변을 따라 긴 판자촌이 형성됐다. 맑은 물이 흐르는 천변은 가난한 사람들이 집을 뚝딱 짓고 살기에 제격이었다. 판자촌엔 잡화점, 연탄가게, 만화가게 따위가 들어섰다. 1950년대 말 청계천 복개공사가 시작된 후 박정희 정권은 이곳 판자촌을 대거 철거하고 69년 경기도 광주(지금의 성남)로 철거민들을 강제이주시켰다. 판자촌은 청계천변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필자가 60년대 초등학교를 다닌 서울 서대문에도 있었다. 한번은 선생님을 따라 가정방문을 간 곳이 우리 옆동네 판자촌이었다. 필자의 집도 누옥이긴 했지만 그렇게 누추한 집은 처음 보았다. 때는 달동네란 말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더보기 [여적] 국기 모독에 대한 분노 2002년 월드컵 때 거리는 태극기 패션으로 넘쳤다. 태극기는 더 이상 ‘국기에 대한 맹세’와 부동자세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인들의 치마폭도 되고 앙증맞은 얼굴 스티커, 스카프가 되기도 했다. 1882년 수신사 박영효가 일본땅에서 태극기를 내건 이래 120년 ‘태극기사’에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태극기가 애국가 속에 펄럭이는 엄숙한 이미지를 벗어나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대상으로 변신한 것이다. 그때 태극기가 거리의 패션으로 전락했다고, 그래서 존엄성을 모독당했다고 시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이번엔 그 반대 경우다. 2003년 8월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앞두고 우익단체들이 연 ‘반핵·반김대회’에서 인공기를 찢는 일이 벌어지자 북한은 불참의사를 강하게 시사했다. 닫힌 북한 사회가 국기 훼손을 곧바.. 더보기 ‘친기업 반노동’ 보도 유감 1987년 7월 울산 현대중공업 등에서 노사분규가 잇따라 터졌을 때 도하 신문·방송들은 이곳으로 몰려들어 대대적인 보도를 했다. 때는 6월항쟁을 거치며 정치적으로 각성된 노동자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시절이었다. 현대엔진에 현대 계열사 최초로 노조가 생긴 뒤 노조 결성과 파업 등 쟁의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이것이 훗날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명명된 노사분규의 대분출이었다. 이상한 것은 언론의 보도태도였다. 6월항쟁 때 시민 쪽으로 돌아섰던 언론은 이 쟁의의 실상과 본질을 왜곡해 노동자들을 여론으로부터 고립시켰다. 이런 식이었다. ‘무법·광란, 울산시청 수라장…술 마시고 부수고 노래하고’ ‘현대중 300여명 차고 방화 등 난동 1시간’ ‘사장 등 맨바닥 앉히고 폭언’…. 6월항쟁 | 경.. 더보기 이전 1 ··· 117 118 119 120 121 122 123 ··· 16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