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정치인의 발언이 어디선가 이미 들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기시감(旣視感)이다. 엊그제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빈발하는 ‘묻지마 살인’을 두고 한 말이 그렇다. 그는 최고위원회의에서 “국민을 분열시키고 불만만 키우는 민주당 구태정치는 우리 사회에서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고 하는 분위기를 계속 강화시키고 있다”며 “<나꼼수>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상의 저질행태, 심지어 학교폭력이나 묻지마 살인 행위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게 2010년 3월16일 당시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한 말과 매우 비슷하다. “10년간의 좌파정권 기간 동안에 편향된 교육이 이뤄졌다. 잘못된 교육에 의해서 대한민국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는 많은 세력들이 생겨나고 있고, 극악무도한 흉악범죄들, 아동 성폭력 범죄들까지 생겨나고 있다.” 당시 세상은 부산에서 여중생을 성폭행·살해한 김길태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이한구와 안상수
두 발설자는 집권당 원내대표로서 묻지마 살인과 아동 성폭행 범죄라는 당시의 심각한 사회문제를 남 탓, 곧 야당의 구태정치와 좌파정권의 교육 탓으로 돌리고 있다. 살인과 아동 성폭행이란 극악무도한 범죄 사례를 맨 뒤에 슬쩍 끼워넣는 수법까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혹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교감이 있었던 건가. 이 원내대표가 그걸 의식한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사고방식이 비슷해서일 것이다. 안 전 원내대표가 꺼내 물의를 빚었음에도 이 원내대표에게서 유사한 발언이 재현된 것은 비슷한 가치관과 확신, 사명감의 발로로 여겨진다. 혹은
그들 나름의 ‘연대의식’이 표출된 것일 수도 있겠다.
이 기시감은 참 구차하며 얼토당토않다는 느낌을 동반한다. 어째선가. 국가의 권력을 잡는다는 건 치안, 국방을 비롯해 국정 전반에 관한 책임을 떠맡는 일이다. 국민에게서 그런 힘을 부여받는 거다. 그럼에도 전 정권 책임론과 야당 책임론부터 앞세우는 건 자신들이 무책임하고 무능한 집단임을 자인하는 짓이다. 정권을 잡은 지 5년, 정권 말이 되도록 툭하면 야당 책임론을 들먹이는 다수 집권당. 너무 누추하지 않은가. 야당에선 새누리당이 집권당 자리를 포기했느냐며 어이없어 한다. 인터넷에는 “이 원내대표는 새누리당의 엑스맨”이란 댓글도
올라온다. 박근혜 후보, 신경 많이 쓰이겠다.
'여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적] 지하생활자의 수기 (0) | 2012.09.03 |
---|---|
[여적] 도량 베풀기의 조건 (0) | 2012.09.03 |
[여적] 아메리카노, 커피 심부름 논쟁 (2) | 2012.08.21 |
[여적] 사라지는 재래시장들 (0) | 2012.08.19 |
[여적] 독도 폭파론과 MB 독도 방문 (0) | 2012.0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