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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도량 베풀기의 조건

엊그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전태일재단을 방문하려다 유족 등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오겠다는데 굳이 막을 것까지 있었느냐”는 반응이 적지 않다. “그렇게 속좁은 짓만 하니 국민으로부터 외면 받는다”거나 “소인배의 행동”이라고 비판하는 댓글들이 보인다. 한마디로 너그럽고 속이 깊은 마음씨, 즉 도량(度量)이 아니란 것이다. 하지만 도량은 아무 때나 베풀어지는 게 아니다. 도량을 주고받을 만한 조건이 필요하다. 그게 뭔가.

박근혜 후보는 요즘 국민대통합을 내세우며 대학교 총학생회장들을 만나는 등 활발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얼마 전 ‘진정성 없는 정치쇼’란 야권의 비난을 무릅쓰고 김해 봉하마을의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는 등 이른바 광폭행보의 일부분이다. 문제는 그 일방통행성이다. 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태삼씨는 “전태일 정신 없이 재단을 찾아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는데, 이건 꼭 운동권 논리라고 할 수 없다. 전씨는 “사전에 사람끼리 마음의 소통 없이 행동하는 박 의원의 방문 자체가 너무 일방적”이라며 “자기 생각을 모든 사람에게 정당화하려는 독선을 지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가 27일 서울 종로 청계천 6가 전태일 다리를 방문, 헌화를 하려하자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이 뛰어들며 쌍용차 해고문제 조속한 해결 등을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양쪽을 감싸고 있는 절박성도 차원이 다르다. 박 후보는 재단 방문이 무산된 후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이 화해하고 협력하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다. 표를 모아야 하는 대선 후보의 절박감 이상을 느끼기는 어렵다. 반면 민주통합당 전순옥 의원은 “비정규직, 최저임금, 청년실업, 가계부채 등 노동현실의 절박함을 온몸으로 이해하고 이에 대한 정책을 가장 앞에 세울 때 국민들이 방문의 진심을 믿고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태일 정신을 생각한다면 쌍용차나 용산참사 희생자 등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먼저 찾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상일 새누리당 대변인의 논평은 이런 기대를 깨부순다. 그는 “박 후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아무리 방해하고 장막을 친다 해도 국민을 통합하겠다는 박 후보의 행보를 막지 못할 것”이라며 “국민을 분열시켜 계층 간, 세대 간, 지역 간 갈등을 조장하는 세력을 물리치고 국민통합의 ‘100% 대한민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량은 좋은 말이지만 남발하면 안된다는 걸 확인시키는 언명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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