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칼부림 사건이나 의정부역 흉기 난동은 비교적 ‘신종’이란 이유에서 미국, 일본에서 발생한 선례들과 비교 분석되기도 한다. 여의도에서 전 직장동료와 행인들에게 마구 칼을 휘두른 김모씨 사건은 일본의 도리마(通り魔) 사건과 비슷하다고 한다. 분노 대상을 공개 ‘응징’한 것 등 미국형 다중살인을 닮았다고 보기도 한다. 총이 아닌 칼을 사용했다 뿐, 영락없이 미국식 총기난사 사건이라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또는 지하생활자 -그린 사람 미상
절망형 은둔자는 주로 쪽방, 고시원, 지하방 등에서 혼자 산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지하생활자의 수기>에 등장하는 ‘나’와 비교해볼 만하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병든 인간이다. … 나는 악한 인간이다. 생각건대 간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 … 내가 치료 받기를 원치 않는 것은 증오심 때문이다. … 나는 이미 오랫동안 이런 식으로 약 20년간을 살아왔다. …” 1864년 나온 이 소설은 무기력하고 자의식 넘치는 독백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그는 지식인이며 고립상태에서 증오에 시달리지만 무슨 범죄를 실행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작가는 결국 <죄와 벌>(1866년)에서 살인을 통해 초인사상을 실현하려다 실패하는 라스콜리니코프를 창조한다.
시대와 사회적 배경은 달라도 ‘지하생활자’는 항상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 때 지하생활자는 물질문명과 전체주의를 냉소하지만 무기력한 지식인이었다면, 이 시대의 지하생활자는 고시원에 틀어박혀 절망과 증오를 쌓아가는 신용불량자나 게임과 음란물에 중독된 외톨이들일 수 있다. 더욱이 한국 사회는 이 사회적 낙오자, 절망형 은둔자들을 ‘양산’하는 체제다. 청년실업, 가계부채, 신용불량, 비정규직, 사회안전망 등 모든 지표가 그 이유를 말해준다. 높은 자살률과 절망범죄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거기에다 대고 그저 엄벌을 촉구하고 불심검문이나 부활하자는 건 참으로 하지하의 방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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