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러시아 특파원이던 1990년대 중반 모스크바 거리에서 희한한 광경을 접하곤 했다. 경찰이 순찰차 안에서 지나가는 사내를 불러 ‘도쿠멘트이(신분증)’ 검사를 하는 것이었다. 속절없이 불려가는 사내들은 대부분 까무잡잡한 피부의 체첸,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등 카프카스 출신들이었다. 러시아는 당시 체첸과 내전 중이었고 카프카스 출신들 가운데 범죄자가 많다고들 했다. 아무리 그렇기로서 지나가는 사람을 마구잡이로, 그것도 차 안에서 불러 검문을 하다니. 그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한다는 것인데, 대단한 사회적 차별구조의 표출로 느껴졌다.
어떤 사건이 특정 민족에 대한 인식을 나쁘게 만드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대표적 사례는 역시 9·11 테러다. 9·11 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미국 내 아랍인·중동 출신들은 일단 테러리스트로 추정됐다고 보면 된다. 이들은 공항에서 수모를 느낄 만큼 검색을 당해야 했다. 부시 대통령의 근본주의적 기독교관도 크게 작용했다. 부시는 세계를 선과 악으로 나눠 미국과 미국에 동조하는 국가는 선, 테러리스트와 미국에 반대하는 국가는 악으로 규정했다. 극단적 이분법이다. 미국은 이 이분법에 이끌려 뛰어든 전쟁에서 지금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원 납치 살인사건 범인 오원춘. 그가 조선족이란 사실을 빌미로 조선족 전체를 잠재적 범죄자로 보고 배척하려는 분위기가 퍼지고 있다. 이런 성급한 일반화는 경계해야 한다.>
성급한 일반화도 문제를 상식과 이성, 합리로 풀어나가는 데 방해가 된다. 우리는 특정 집단의 정체성을 가령 출신지역이나 나라와 민족, 종교, 인종 따위에 따라 습관적으로 분류하려 드는 경향이 있다. 특정 직업도 그렇다. 이런 성급한 일반화는 번번이 진실을 호도하고 왜곡한다. 저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이 방화를 한다. 우물에 독약을 집어 넣었다”는 유언비어에 홀려 조선인들을 무참히 학살할 때 작동한 논리도 극단적 이분법과 성급한 일반화 아니었나 한다.
요즘 한국에 사는 조선족들에게 매우 차가운 시선이 쏟아지고 있다고 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수원 성폭행 살인 사건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극단적 이분법과 성급한 일반화를 경계해야 할 것 같다. 한국엔 조선족이 약 50만명이나 산다. 그들의 대부분은 선량하게 살면서 인간적 대접을 받고 싶어 하는 우리의 이웃이다. 개인 범죄를 집단문제로 일반화해선 안된다. 광기와 싸우는 자리를 이성 대신 또 다른 광기가 차지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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