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사찰과 증거인멸을 지시한 의혹을 받고 있는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이 엊그제 “(지원관실 컴퓨터에 보관된) 자료 삭제에 관한 모든 문제는 바로 내가 몸통”이라며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밝혔다. 증거인멸 지시를 폭로한 장진수 전 윤리지원관실 주무관은 이 말을 듣고 “소가 웃을 일”이라고 말했다. 우리말엔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란 표현이 있는데,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않고 묵묵한 소가 듣고 웃을 정도로 어이가 없다는 뜻이다. 왜 그는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이 20일 프레스센터에서 청와대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에 대해 자신이 이 사건의 '몸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다른 건 둘째치고 몸통을 자처하는 기자회견치곤 내용이 너무 어설프고 허술하다. 몸통이란 주장을 믿기엔 의문점이 많다. 가령 그는 장 전 주무관에게 입막음용이 아니라 ‘선의로’ 2000만원을 줬다고 주장했다. 이 말도 믿기 어렵지만 장 전 주무관이 청와대 민정수석실로부터 받았다는 5000만원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이 5000만원은 국세청 간부가 마련한 돈으로, 청와대 등에서 1억원가량이 전달됐다는 주장도 나왔다. 몸통이라면 이런 전모를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는 그런 것 같지 않다. 되레 의심만 키웠다. 컴퓨터 하드디스크 삭제 지시와 2000만원 전달 사실을 시인하면서 장 전 주무관의 폭로에 힘이 더욱 실리게 됐기 때문이다. 이 전 비서관이 이 사건의 ‘윗선’인 건 맞는데 몸통임을 주장하기엔 역부족인 듯하다. 부랴부랴 몸통 대역으로 투입된 탓인지 연기라고 해도 전혀 몸통답지 않다.
필자는 이 사건 발생 초기인 2010년 8월 이 <여적> 난에 ‘몸통·깃털 사건의 공식’이란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때 이미 이 사건은 ‘게이트(권력형 비리)’의 냄새를 물씬 풍겼는데, 자칫 이 사건이 과거처럼 뻔히 보이는 정형화한 경로를 밟아 처리되진 않을까 염려됐다. 즉 몸통은 건재하고 깃털만 처벌받고 말 것이라는. 그 후 1년 반이 지나 쓴 이번 글의 제목에 ‘2’를 붙인 이유는 권력형 비리 사건의 공식에 중대한 변형이 이뤄진 듯하기 때문이다. 좀처럼 정체를 드러내는 법이 없는 몸통이 몸통을 자처하고 나섰다는 점에서다. 그런데 그게 너무 허술해 그 역시 깃털인 게 눈에 보인다. 공식은 변형됐지만 몸통이 은폐됐다는 냄새는 더욱 짙어졌다. 음악으로 치면 몸통·깃털 사건에 변주를 시도함으로써 주제가 더욱 선명히 드러난 셈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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