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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프랑스 의사와 카뮈의 ‘페스트’


프랑스인 외과의사가 시리아 반정부군 거점지역인 홈스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치료하다 탈출한 사연이 뉴욕타임스에 엊그제 소개됐다. ‘국경없는 의사회’ 창립회원인 자크 베레는 지난달 홈스의 격전지 인근에 임시병원을 차려놓고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서방 의사로는 처음 홈스에 들어간 그는 2주밖에 머물 수 없었지만 무려 89명에게 수술을 했다. 그러나 생존자는 겨우 9명에 불과했다. 어떤 사람은 철철 흐르는 피를 간신히 지혈하는 수술이 끝난 지 3시간 만에 퇴원해야 했다. 수술대는 1개, 침대는 3개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문은 그가 ‘안락한 파리 생활’을 떠나 의료장비 가방만 들고 홈스에 잠입한 과정을 자세히 전했지만 왜 이런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 설명이 없다. 다만 71살이나 되는 그가 40년 동안 베트남·라이베리아·수단·시에라리온·르완다·체첸·이라크·리비아 등 위험지역을 돌아다녔으며, 지금도 홈스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고 밝혔다. 그도 자기 자랑보다는 헌혈이 줄을 잇는 시민들의 연대정신과 시련에 굴하지 않는 높은 사기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했다.


<시리아 홈스에서 목숨을 걸고 희생자들을 도운 프랑스 의사의 이야기는 폐쇄된 죽음의 도시 오랑에서 페스트와 의연히 맞서 싸운 사람들을 그린 카뮈의 소설 '페스트'(1947)를 생각나게 한다. 사진은 생각에 잠긴 알베르 카뮈.>



그가 전한 홈스의 참상은 필자의 기억을 젊은 시절 읽은 카뮈의 소설 <페스트>로 이끌었다. 어느 날 알제리의 해안도시 오랑에 갑자기 페스트가 창궐해 사람들이 죽어간다. 폐쇄된 도시에 갇혀버린 사람들은 절망과 고통 속에 좌절한다. 그러나 의사인 주인공 리유와 몇 명의 주변 인물들은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지 않고 투쟁에 나선다. 페스트는 인간이 처한 한계상황, 카뮈적 표현으론 부조리를 상징한다. 잔혹한 학살을 저지르는 정부군에 포위된 홈스와 견줄 만한 상황이다. 노의사는 홈스의 상황에 대해 “잔인함과 비열함, 어린이와 가족들의 고통을 목격했다”고 전했는데 이는 오랑에서 페스트가 창궐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홈스 시민들이 겪는 극한적 처지와는 별개의 문제로, 말은 안 했지만 그에게는 나름의 단단한 철학이 있을 것 같다. 결국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승리한다는 믿음 같은 것 말이다. 아무나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오랑과 홈스처럼 곤경에 갇혀 구원과 연대의 손길을 기다리는 곳이 많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지난해 희망버스는 희망의 증좌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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