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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칼럼

[신문로] 트럼프 ‘승인’ 발언 계기로 살핀 숭미

지난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기자가 ‘한국 정부의 5·24조치 해제 검토’에 대해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그들은 우리의 승인(approval) 없이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승인 없이는 아무것도 안 한다.” ‘승인’은 허락, 재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미국 대통령이 주권국 정책을 두고 이 말을 쓰는 것은 외교적 결례다. 협의나 의논이란 말도 있는데 구태여 승인이라고 표현한 건 평소 트럼프의 거침없는 화법이 발동한 탓일까.

트럼프가 부동산 재벌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자서전 ‘거래의 기술’을 보면 그는 대단히 영리하고 치밀한 사람이다. 성공을 위해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하고 빈틈없고 야비할 정도로 냉정하다. 따라서 시도 때도 없이 막말이나 일삼고 허세나 부리는 억만장자 정치인이란 이미지는 본모습이 아니다. 막말도 충분히 계산된 것일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0일(현지시간) 백악관 집무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강경화 외교장관의 5·24 제재 해제 검토 발언에 대해 "그들은 우리의 승인 없이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쪽이 강경화 외교부 장관인 것은 맞다. 그는 국회 국정감사에서 ‘금강산 관광을 못하는 게 5·24조치 때문인데, 5·24조치를 해제할 용의가 있느냐’는 질의에 “관계부처와 검토 중”이라고 대답했다. 천안함 사건에 대응한 5·24조치는 금강산 관광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숙지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정치권 반응은 최소한 균형잡힌 양비론이어야 했다. 순서를 따지자면 중대한 외교적 결례를 저지른 트럼프를 비판하고 강 장관의 미숙한 답변을 지적하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달랐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식 대변인은 “트럼프 대통령 발언은 한·미 간 긴밀한 공조를 강조한 뜻으로 한 말이지, 우리 정부의 5·24 조치를 특정하여 이견을 표출한 것이 아니다”라고 도리어 그를 두둔했다.

반미주의는 미국 힘에 대한 분노 표출

자유민주당 김성태 원내대표는 “트럼프 대통령의 승인이라는 표현은 외교적 결례지만, 대북 제재에 관한 국제사회의 공감대 없이 일방적으로 해제하려는 정부가 자초한 측면이 더 크다”고 정부 비판에 방점을 찍었다. 그나마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트럼프 발언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한·미동맹은 미국의 일방적 지시에 좌우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며 “승인이라는 표현은 주권국가이자 동맹국인 우리 국민에 대한 모욕”이라고 밝혔다. 승인 발언은 “한·미동맹의 현실과 당위를 무시한 외교적 ‘갑질’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정치권이 이런 미온적 반응을 보인 데는 뿌리깊은 친미·숭미의식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세기가 ‘미국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반미의 세기’가 되고 있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미국의 쿠바 전문가 줄리아 스웨이그는 ‘오발(誤發):반미의 세기에 친구 잃고 적 만들기’란 책에서 전세계적 흐름인 반미주의를 흥미롭게 분석했다. 그는 한국에는 ‘친미’, ‘반미’를 비롯해 ‘항미’, ‘용미’, ‘숭미’, ‘연미’, ‘혐미’, ‘비미’ 등 미국에 대한 태도를 표현하는 단어가 8개나 된다고 분석했다.

미국 미시간 대학 안드레이 마코비츠 교수가 쓴 ‘미국이 미운 이유’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간 반미주의 이론서다. 책은 반미주의가 특정 지역을 넘어 전세계적·보편적 현상임을 일깨운다.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심각하지만, 유럽에서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남미에서 아프리카까지를 아우른다.

 

작년 1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환영하는 보수단체 시민들

‘해방자의 나라’로 우리 의식 속에 각인

반미주의는 근본적으로 미국의 힘과 영향력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다. 그래서 “미국화는 모든 부정적인 것들의 동의어가 돼 있다. 미국인들은 어떤 일을 해도 욕을 먹고 안 해도 욕을 먹는다.” 이 이론이 비추면 자나깨나 과거 친일이 그랬듯 유독 미국에만 ‘골수 친미’인 한국 보수우파의 체질은 꽤나 예외적인 것이다. 박근혜 탄핵 반대 시위에도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를 들고 나온다.

이진구 한국종교문화연구소장은 이렇게 분석했다. “미국은 이 땅에 복음을 처음 전해 준 ‘은혜의 나라’이며,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킨 ‘해방자의 나라’이며, 북한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지켜준 ‘혈맹의 나라’이며, 전후 굶주린 고아와 난민들을 도와준 ‘구호의 나라’로 우리의 의식 속에 각인돼 있다.” 개신교인에 국한된 분석이긴 하지만 일반인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이로써 ‘미국 무오류’의 신앙이 탄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