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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칼럼

[신문로] 한일 시민의 ‘열린 민족주의’ 는 계속 추구해야

다섯사람이 거리를 걷고 있는, 특별할 것도 없는 사진이 각별하게 다가왔다. 지난 주 도쿄 시내 신일철주금(구 일본제철) 본사 앞. 이들은 최근 한국 대법원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손해배상하라고 판결하자 판결 이행 요청서를 전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다섯 명 중 네명은 소송 피해자 측 변호사 등 한국인이었고, 한명은 야노 히데키 강제연행·기업책임추궁 재판 전국네트워크사무국장으로 일본인이었다.

이 사진이 각별한 건 두 가지 점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첫째, 비록 ‘계란으로 바위치기’일지라도 불의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포기할 수 없다는 것. 둘째,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의 깨어있는 시민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다.

 

강제징용 소송 피해자 측 변호인과 한·일 시민단체 활동가가 12일 한국 대법원의 손해배상 판결 이행을 촉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하기 위해 도쿄의 신일철주금 본사 건물로 걸어가고 있다. 왼쪽부터 야노 히데키 강제연행·기업책임 추궁재판 전국네트워크 사무국장, 김민철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집행위원장, 김진영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임재성 변호사, 김세은 변호사. 도쿄 | 경향신문 김진우 특파원

 

예상대로 신일철주금측은 면담을 거부한 채 이들을 문전박대했다. 신일철주금이 미리 준 입장문을 경비 용역회사 직원이 읽었다. “이번 판결은 1965년 한일청구권과 일본 정부의 견해와 반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신일철주금은 2012년 대법원이 원고승소 취지로 이 사건을 파기 환송하자 판결에 따르겠다고 했다가 태도를 바꿨다. 일본의 우경화 바람을 탔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는 별개로, 일본 정부는 역사적으로도 틈만 나면 과거사를 부인하고 미화해왔다. 식민지배나 침략전쟁, 반인륜적 범죄,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해 단 한 차례도 진실되게 사죄한 적이 없다.

드문 예외가 1993년 발표된 고노담화다. 고노 요헤이 당시 관방장관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군대의 관여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아베 신조 총리는 이 담화를 부정했다. 고노 당시 관방장관(뒤에 외무상도 지냈다)의 아들인 고노 다로 외무상은 이번 대법원 판결에 ‘폭거’란 거친 표현을 썼다.

불의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포기할 수 없어

과거사에 관한 일본 정부의 파렴치성은 상수(常數)적 성격이다. 그래서 나치의 반인륜적 만행을 비판하는 독일과 자주 비교된다. 이번에도 식민지배의 불법성이란 근본적인 요인은 성찰하지 않고 되레 공세를 펴고 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속담이 딱 맞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문제는 없지 않았다. 가령 2005년 노무현정부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문서를 공개하면서 민관합동위원회에서 청구권 교섭 과정을 검토한 결과 ‘강제징용 피해자의 개인 청구권이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고 결론지었다. 이후 정부는 이 입장을 유지해왔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생존자인 이춘식씨(가운데)가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내려진 10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회담 과정에서 일본 측이 피해자들에 대한 개별 배상도 하겠다고 밝혔으나 우리가 정부 차원에서 일괄 배상을 받겠다며 ‘정치적 타결’로 협상을 마무리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개별 보상을 하지 않았다. 1975~1977년 사망자 8552명 유가족에게 1인당 약 30만원씩 총 25억6560만원만 지급했을 뿐이다.

고노 외상이 “한·일 국교정상화 때 국민에 대한 보상은 한국 정부가 책임지기로 했다”고 주장한 것은 이게 근거다. 앙승태 대법원 시절 법관 해외공관 파견 등 목적을 달성하려고 청와대와 재판거래를 하면서 강제징용 소송을 까닭 없이 수년간 지연시켰다는 의혹도 있다.

국가 간 협상에서 ‘대표선수’인 정부의 일관성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2015년 위안부 합의에 대해 문재인정부가 부정적 인식을 밝히자 ‘한국은 정부가 바뀔 때마다 약속을 뒤집는다’는 비판도 나왔다. 일본 정부의 완강한 태도로 볼 때 대법원 판결 이행 전망은 어둡다 하겠다. 변호인들은 한국 내 신일철주금 재산에 대한 압류절차를 밟겠다고 한다. 일본 측 주장대로 우리 정부가 선제적으로 배상하는 방안도 있다. 그러나 수백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돼 현실성이 없다.

징용 판결 이행 바라는 일본 시민들이 있다

그렇다면 한일 양국 시민들이 무슨 역할을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일본에는 ‘재특회’ 같은 극우단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징용 판결에 있어서도 이행을 바라는 일본 시민들이 있다. 임지현 교수(한양대)와 사카이 나오키 교수(미국 코넬대)는 책 ‘오만과 편견’(2003)에서 “양국 시민들은 각각 ‘세습적 희생자 의식’(한국)과 ‘식민주의적 죄의식’(일본)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배타성과 폐쇄성으로 무장한 ‘닫힌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열린 민족주의’를 지향해야 한다는 뜻으로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