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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칼럼

[신문로] 재벌개혁 실종되고, ‘노동자’ 표현 사라지고

여성 최초로 미국 백악관에 출입한 헬런 토머스란 전설적 기자가 있었다. 그는 대통령에게 공격적인 질문을 퍼붓는 것으로 유명했다. 허스트 커뮤니케이션 기자로 있던 2006년 3월 그는 부시 대통령에게 물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당신이 이라크를 침공하며 내세운 모든 이유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났습니다. 전쟁을 하는 진짜 이유가 뭡니까. 석유도 아니라고 하고, 이스라엘 때문도 아니라고 하니, 대체 무엇입니까?”

지난 주 문재인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에서 비슷한 광경이 벌어졌다. 김예령 경기방송 기자가 질문했다. “현실 경제가 굉장히 얼어붙어 있다. 대통령도 이 상황을 ‘엄중하게 바라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정책 기조를 바꾸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고 그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적절한 질문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대통령은 “양극화·불평등 구조를 바꾸지 않고서는 지속가능한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기자회견문 30분 내내 말씀드렸다”며 넘어갔다. 기자의 질문은 ‘근자감’이란 제목이 붙어 온라인에서 회자됐다. 공격적 질문 태도를 문제 삼는 댓글이 쏟아졌다.

 

김예령 경기방송 기자가 10일 문재인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에서 질문하는 모습


KBS 최모 기자는 “질문하는 방식이 구체적이지 않다 보니 ‘그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가’ 같은 이상한 질문이 되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정청래 전 의원도 “뜬구름 잡는 이미지에 기반한 질문은 하지 마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헬런 토머스에서 보듯 기자는 우호적 질문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기자는 우호적 질문만 하지는 않아

그러나 나는 좀 더 본질적 부분에 대해 묻고 싶다. “경제정책 기조에 변화가 없다”는 문 대통령의 언명이나 이를 전제로 한 기자의 질문은 진실일까. 왜냐하면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에 큰 변화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재벌개혁이 실종된 것이다. 지난해와는 달리 재벌개혁은 한마디도 거론되지 않았다.

지난해 문 대통령은 “재벌개혁은 중요하다. 엄정한 법 집행으로 일감 몰아주기를 없애고 총수 일가의 편법적 지배력 확장을 억제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 후 은산분리 같은 원칙마저 훼손해 재벌개혁 추진에 경고등이 켜졌다. 공정, 일자리, 산업혁신, 불평등 해소, 자영업자 대책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전제돼야 하는 게 재벌개혁이다.

다른 하나는 취임 초 강조했던 노동존중의 목소리가 현저히 약해진 것이다. 이것은 재벌개혁 드라이브가 약화된 것과 표리관계라고 본다. 정부는 지난해 최저임금을 16.4% 인상하고 주 52시간제 시행에 들어갔다. 그러나 노동존중은 지속되지 못했다. 재계는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이 경제를 악화시킨다고 비판했다.

노동개혁이 지지부진한 상황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가 있다. 정부 자료에 ‘노동자’ 대신 ‘근로자’란 표현이 부쩍 늘어난 것이다. 최근 고용노동부가 낸 최저임금 결정체제에 관한 보도자료를 보면 11쪽 분량에서 근로자는 18차례 언급된 반면 노동자는 단 1차례 나왔다. 일본의 최저임금 제도 설명 부분에서였다. 이재갑 장관은 노동존중에 앞서 고용 하락을 우려한다. 장관이 먼저 탄력근로제 확대를 거론하고 최저임금제 속도조절을 말한다. 정부의 정책 기조가 노동존중에서 ‘친 시장’ 쪽으로 옮겨간 것으로 의심되는 대목들이다.

노동존중에서 ‘친시장’으로 옮겨가

그 대신 들어선 게 ‘혁신적 포용국가’란 슬로건이다. 문 대통령은 신년 회견문에서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사람중심 경제’와 ‘혁신적 포용국가’는 “공정경제를 기반으로 혁신성장과 소득주도성장을 통해 성장을 지속시키면서 ‘함께 잘사는 경제’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중심, 혁신, 포용, 성장 다 좋은 말이다. 다만 그런 추상어를 나열하는 것과 성과를 얻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박근혜 정부의 첫번째 국정목표가 창조경제였다. 하지만 친박 등 측근들조차 창조경제를 잘 이해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았다. 201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토머스 사전트 뉴욕대 석좌교수·서울대 겸임교수는 2013년 사석에서 창조경제에 관한 설명을 듣고 “불쉿(허튼소리)”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제자 한 명이 10여 분간 창조경제를 구체적으로 설명을 했더니 나온 한마디 반응이었다.  2019-01-15 08:32:5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