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미 양국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정에 서명했다. 한국이 낼 분담금은 1조389억원으로 지난해보다 8.2% 올랐다. 많이 오른 것도 문제지만 협정 유효기간은 1년으로 돼 있어 이르면 올 상반기에 다시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각료회의에서 “한국의 분담금은 몇 년 동안 더 오를 것”이라며 추가 증액 압박을 공언했다.
미국 언론도 바쁘다. 워싱턴포스트는 차기 협상에서 미국이 ‘주둔비용+50’ 공식을 꺼낼 수 있다고 보도했다. 주둔국에 주둔비용은 물론 이 비용의 50%를 더 부담시키겠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의 분담액은 미군 주둔비 전체의 대략 절반으로 추산되므로 그렇게 되면 분담액이 최대 3조원으로 늘어날 수 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가 8일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한미방위비분담금 특별협정(SMA)에 공식 서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에 대해 미국 안에서도 “미군을 용병으로 만들려 하느냐”는 비판이 나온다. 하지만 방위비 대폭 증액을 요구하는 흐름은 계속될 것 같다. 미국의 요구는 적정한 것일까. 이를 따져보기에 앞서 떠오르는 옛날 노래가 있다.
<그날 밤 극장 앞에서 그 역전 카바레에서/ 보았다는 그 소문이 들리는 순희/ 석유불 등잔 밑에 밤을 새면서/ 실패 감던 순희가 다홍치마 순희가/ 이름조차 에레나로 달라진 순희 순희/ 오늘 밤도 파티에서 춤을 추더라…>
에레나가 된 순희
가요 ‘에레나가 된 순희’다. 1953년 한정무가 처음 불렀고 안다성이 재취입해 크게 히트한 탱코풍 노래다. 제목부터 상상력을 강하게 발동시킨다. 역전 카바레는 미군들이 드나드는 곳일 터이다. 무슨 곡절이 있었기에 순희는 에레나란 서양 이름을 쓰는 여자가 되어 춤을 추고 있다. 필시 가슴 찡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보편적 체험이다.
긴 미군 위안부 역사가 있는 나라
이른바 양공주가 되어 기지촌을 떠돌던 ‘에레나’와 ‘매기’ ‘안나’가 얼마나 많았나. 국회에 계류돼 있는 ‘주한미군 기지촌 성매매피해 진상규명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안’ 관련자료에 그런 통계가 있다. 기지촌 성매매여성의 수는 1940년대 1639명, 1950년대 4049명, 1960년대 10000명, 1970년대 16195명, 1980년대 328명, 1990년대 451명, 2000년대 645명, 2010년대 856명이다. 다 합치면 34163명이다(국회예산정책처 자료). ‘에레나가 된 순희’가 나온 1950년대에 이미 4000명이 넘었다.
1970년대 동두천의 기지촌 풍경. 구와바라 시세이(눈빛 아카이브) 제공.
사진출처 한겨레
미군 5만2000명이 주둔 중인 일본에도 ‘특수위안시설협회’라는 미군 위안소가 있긴 했다. 2차대전 종전 직후 일본 정부 주도로 개설돼 이듬해 3월까지만 짧은 기간 존속했다. 오늘날은 미군이 많은 오키나와의 ‘스나쿠(스낵)’나 바 같은 곳에서 음성적인 성매매가 이뤄지는 정도라고 한다. 미군이 주둔한 나라는 세계 59곳에 이른다. 하지만 이렇게 긴 미군 위안부 역사가 있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에레나가 된 순희’ 같은 슬픈 노래가 나온 나라가 또 있을까.
그 많던 에레나, 우리의 순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움직임은 있다. 기지촌 성매매에 종사하던 여성들은 2014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고 지난해 2월 열린 항소심에서 승소했다. 재판부는 “국가는 기지촌 내 성매매를 방치한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정당화했다”며 원고 117명에게 700만원~300만원의 위자료 지급을 명했다.
피해여성 박모씨는 선고 직후 이렇게 말했다. “재판이 시작된 지 3년 7개월 만에 오늘의 판결을 얻었다. 그러나 우리의 투쟁은 이제 시작이다. 고통의 나날을 보상받고 동료들의 아픔이 치유되고 사과 받는 그날까지 계속할 것이다.”
그는 영리하고 치밀한 사람
우리 정부만 책임지면 될까. 그렇지 않다. 그 피해여성의 말에 나름대로 덧붙여 보겠다. “우리의 투쟁과 분노의 대상은 국가만이 아니다. 미군도 있다. 법적 책임은 아니라도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 묻는다. 에레나도, 황구의 비명(담비 킴이란 양공주가 나오는 천승세 단편소설)도, 그리고 분담금 대폭 인상도 우리가 받아들여야만 할 숙명일까.
이런 각오와 철학을 깔고 향후 분담금 협상에 임해야 한다. 물렁하게 대처하면 안되는 분명한 이유다. 트럼프 자서전 ‘거래의 기술’에 보면 그는 영리하고 치밀한 사람이다. 강하고 빈틈없고 야비할 정도로 냉정하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2019-03-13 07:33:48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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