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치요다구 문부과학성 앞에서는 매주 금요일이면 ‘금요행동’ 집회가 열린다. 재일 조선학교 차별을 반대하고, 민족교육 탄압 중지를 요구하는 행사다. 참가자는 일본의 조선대학생 등인데 2013년 5월부터 시작돼 지난해 말로 250회를 넘어섰다.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일마다 27년째 열리고 있는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 촉구 수요집회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열기는 그에 못지않다.
참가자들은 조선학교에 고교 무상화 제도를 적용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조선고급학교가 고교 무상화 제도에서 배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2010년 학생 1명당 12만엔~24만엔의 취학 지원금을 주는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조선학교는 예외다. 조선총련과 밀접한 관계라거나, 조선학교는 정규학교가 아니란 이유를 든다. 극우 정치인이자 작가 이시하라 신타로는 도쿄 도지사 재임 때 “(조선학교 내에서) 반일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며 지원금 지급을 반대했다.
지난달 말 세상을 떠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가 생전에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조선학교를 적극 지원해온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대표는 “임종하시던 28일 오후 5시쯤 눈을 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끝까지 싸워 달라’ ‘재일 조선학교 지원을 맡길 테니 열심히 해달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둘째줄 가운데), 길원옥(맨앞) 할머니가 지난해 9월 28일 오전 일본 오사카 조호쿠 조선초급학교를 찾아 태풍 피해 복구 지원금을 전달하고 있다. /정의기억연대 제공
재일동포 아이들을 향한 고인의 사랑은 각별했다. 2016년부터 조선학교 학생 6명에게 ‘김복동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으며, 2017년 ‘김복동의 희망’이란 단체의 명예회장으로 학생들을 돕고 있다.
“돈 없어서 공부 못하는 학생들 없어야”
이를 위해 5000만원을 기부했다. 올 초 공익사단법인 정이 제정한 바른의인상금 500만원도 조선학교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아낌없이 베푸는 모습이었다. 어째서였을까. 김 할머니 스스로 작년 9월 라디오에서 밝힌 적이 있다. “내가 한참 공부할 나이에, 15살에 끌려갔거든요. 그래서 공부를 못했잖아요. 내가 만약에 살아서 돌아가면 나는 때가 늦어서 공부를 못했지만, 돈 없어 학교 못가고 하는 애들을 공부시키겠다는 결심을 갖고 있었어요.”
그의 조선학교 사랑은 어린 나이 일본군에게 끌려가 공부를 하지 못했다는 한과 고교 무상화 정책에 유일하게 조선학교만 제외시킨 일본 정부를 향한 울분, 아이들을 향한 애정이 합쳐진 결과였다. 윤 대표는 “김 할머니의 삶을 되돌아보면 늘 남을 배려하고 남의 아픔을 감싸려 노력해왔다”며 “할머니가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아픔이 클수록 다른 사람의 아픔을 돌아보라는 것”이라고 고인을 회고했다.
최근 TV인터뷰에서 배우 권해효가 내린 분석은 더 절절하다. “할머니하고 연대해 준 분들은 동포 사회에도 있었습니다. 동포 사회 중심에 학교가 있었고요. 그 학교를 할머니께서 만났을 때 할머니와 일종의 동질감(을 느꼈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 학교 학생들이나 할머니나 일본 침략전쟁과 분단의 피해자로서 할머니가 인식하셨고…”
실제로 지난해 9월 김 할머니는 길원옥 할머니와 함께 오사카 조호쿠(城北) 조선초급학교를 방문했다. 태풍 ‘제비’로 피해를 입은 이곳을 찾아 복구 지원금을 전달했다. 할머니는 늘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 없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그런 할머니에게 조선학교가 처한 어려움은 결코 남의 일로 넘길 게 아니었다.
동일본 대지진 때도 피해자 돕기 모금
할머니는 또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때도 피해자 돕기 모금 제안을 하고 첫번째로 기부했다. 2014년엔 베트남 한국군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사죄와 지원 메시지를 보냈다.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돕고 전쟁 상황 속 폭력행위를 규탄하는 데는 국경을 상관하지 않은 것이다.
이토록 할머니 시야를 넓혀준 것은 무엇일까. 이게 궁금한 것은 종종 극우 정치인 등에게서 정반대 경우를 보기 때문이다. 생각하건대 할머니가 겪어온 신산의 세월이 그렇게 만든 것 같다. 고난을 통해 온몸으로 체득한 깨달음의 결과일 것이다. 우리는 자기 경계 밖 사람들을 타자화하고 차별하려는 유혹을 느낀다. 할머니는 그 경계를 넘어서는 것을 실천하고 가셨다. 2019-02-19 09:36:34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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