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재해를 당한 근로자는 8만9848명이며, 사망자는 964명이다. 매일 240여명이 부상하고 2.64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한국의 사고성 사망만인율(노동자 1만명당 사고로 인한 사망이 몇명인지 나타냄)은 0.71로 미국, 독일, 일본 등 선진국에 비해 2~3배나 높다.
7일 오전 서울 동작구 상도동 다세대주택 신축 공사현장에서 지반이 침하하면서 콘크리트 옹벽(축대)이 무너져 인근 상도유치원 건물 일부가 허물어지고 기울어 있다.
그러나 환자가 공항 검역을 그대로 통과한 것은 큰 문제였다. 이 환자는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고 입국장을 통과한 뒤 4시간 만에 삼성서울병원에서 의심환자로 분류됐다. 만약 환자가 몸에 이상을 느껴 병원을 찾지 않고 일상생활에 복귀했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하기 힘들다.
일터만 위험한 게 아니다. 며칠 전엔 서울 동작구 상도유치원 건물이 인근 다세대주택 공사장의 옹벽이 무너지면서 10도 가량 기울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밤 사이였기에 망정이지 대형 인명피해가 날 뻔했다. 그 전엔 서울 금천구 가산동의 오피스텔 공사장 흙막이가 무너지면서 대형 싱크홀이 생겼다. 싱크홀 맞은편 아파트 주민들은 아직도 집에 들어가기 두렵다.
한국이 안전한 사회가 아니란 증거는 많다. 8일엔 쿠웨이트에서 귀국한 60대 남성이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확진 판정을 받았다. 2015년 유행 이후 3년 만이다. 메르스는 초동 대응이 중요한데 그 점에서는 3년 전에 비해 나아졌다. 당국이 메르스 확진 사실을 공개한 시점은 환자가 귀국한 지 27시간 뒤였다. 3년 전엔 보름이나 걸렸다.
이 사건들은 하나같이 인재의 성격이 강하다. 그 점에선 유치원 인근 옹벽 붕괴 같은 ‘관습형’ 사건이나 메르스 같은 ‘신종 출몰형’ 감염질환이나 마찬가지다. 메르스 환자의 경우 쿠웨이트 현지에서 설사 증상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입국 때 휠체어를 탔을 정도였다.
위험은 하층 국민에 축적돼
지난 3월 상도유치원은 관할 동작구청에 건물 바닥 균열 신고를 했지만 구청은 현장 확인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유치원은 이수곤 서울시립대 교수(토목공학)에게 안전진단을 의뢰했고 이 교수는 ‘보강 조처 없이 굴착하면 붕괴 위험이 있다’는 진단 보고서를 유치원에 써줬다. 유치원은 이를 동작구청에 제출했지만 별다른 조처는 없었다.
1986년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란 중요한 책을 저술한다. 이 책은 현대 산업사회를 위험이 전면화하고 일상적인 것이 된 사회, 즉 위험사회로 규정했다. ‘위험사회’라는 용어는 현대사회를 규정하는 새로운 키워드로 떠올랐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위험분배의 역사는 부와 마찬가지로 계급유형에 밀착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만 그 방향은 서로 반대이다.” 즉 부는 상층에 축적되는 반면 위험은 하층에 축적된다. 그런 만큼 위험은 계급사회를 폐지하지 않고 강화한다. 여기까지는 새로운 분석이 아니다. 빈곤이 위험을 만연시키고 부자가 안전과 자유를 사들일 수 있다는 건 상식에 속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라는 기발한 명제를 제시했다. 현대사회의 위험은 계급 및 국가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며 생태재해와 오염물질이 국경을 무시하듯 계급경계도 무시한다는 것이다. 벡은 이를 부메랑 효과로 불렀다. 위험이 평등하고 민주적이라는 벡의 생각은 탁견으로, 그가 체르노빌 사고가 난 역사적인 해에 <위험사회>를 쓴 것은 우연치고는 절묘해 보인다.
벡은 풍요로운 근대화는 환경오염과 기후변화, 원자력 발전으로 인한 재앙이란 엄청난 부작용을 동반했다면서, 위험사회에서는 부의 추구가 아니라 상존하는 위험을 막는 일이 최우선 가치가 되었다고 말한다.
상존하는 위험 막는 일이 최우선 가치
이를 긍정하면서도 필자가 달리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위험사회를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시급히 해야 할 것은 벡의 다분히 사변적 통찰이 아니라 구체적 행동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환경오염, 기후변화, 원전 공포 같은 거대한 상대들엔 물론 치밀한 대처가 필요하다. 하지만 가령 상도유치원 사건은 행정당국, 관할구청의 무사안일이나 인근 공사장에 대한 부실 감리가 직접 원인이다. 그만큼 우리의 위험사회 대처 능력은 철학적 담론을 애써 끌어들이기 민망할 만큼 초보적 단계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다. 2018-09-12 10:00:14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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