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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칼럼

[신문로] 재판거래, 유신시대의 상흔인가

‘긴조’라고 하면 20대와 30대 등 젊은 세대에게는 생소할 것이다. 긴급조치의 줄임말로 ‘유신시대(1972~1979)’에 호랑이 같은 존재였다. 유신헌법 53조는 “대통령은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하는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대통령이 자의적으로 헌법 개정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었다.

이 긴급조치에 의해 국민의 기본권 중 하나인 재판 청구권은 부정되었다. 9차례 발령된 긴급조치는 억울한 피해자를 많이 낳았다. 말 한마디 잘못 해 감옥에 끌려간 사람이 태반이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6월 1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자신의 자택 인근에서 대법원장 재임 시절 법원행정처의 ‘(박근혜 청와대와) 재판 거래 의혹' 등 사법행정권 남용 논란에 대해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가 긴급조치로 기소된 사건 589건을 조사한 결과 282건(48%)이 음주 대화나 수업 중 박정희 정권이나 유신체제를 비판한 경우였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처벌받은 피해자는 모두 1140명인데, 민변 조사에 따르면 1500명으로 늘어난다.

2010년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잇따라 위헌 결정을 내리자 긴급조치 피해자들이 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1·2심에서는 피해자들이 승소했다. 그러나 문제는 대법원이었다. 2015년 3월 대법원은 “위헌은 맞지만 배상할 필요는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했다.

대법원이 내놓은 논리는 해괴한 것이었다. “긴급조치는 위헌·무효이나 유신헌법에 근거한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로서, 대통령은 국민 전체에 대한 관계에서 정치적 책임을 질 뿐이지 국민 개개인의 권리에 대응하여 법적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다.”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라는 궤변을 연상시켰다. 대법원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의식해 박정희 정권에 면죄부를 줬다는 해석도 나왔다.

긴급조치 의해 재판청구권 부정돼

지금까지는 이 ‘긴조 손배소’ 무죄 판결이 요즘 한창 문제되고 있는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거래 의혹과 직접 관련된 것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전개 양상이 다른 재판거래 사건들과 상당히 닮았다.

 

     긴급조치 9호(1975. 5. 13)를 보도한 신문

대표적인 것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이다. 2015년 2월 항소심이 원 전 원장에게 선거법 위반 실형을 선고하자 법원행정처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회부를 바라는 청와대의 의중을 파악하고 증거능력 인정 여부 등 핵심 쟁점을 정리한 문건을 작성해 대법원 재판연구관에게 전달했다. 사건은 전원합의체에 회부됐고 대법관 13명이 전원일치로 원심을 파기했다.

전교조가 법외노조 통보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행정소송을 낸 것도 2016년 2월 상고 후 30개월째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13년을 끌어온 KTX 해고승무원 사건은 최근 코레일이 해고자 복직에 합의했지만 전형적인 재판거래란 의혹을 받았다. 해고승무원은 1·2심에서 부당해고 당했다며 승소했으나, 청와대와 대법원의 재판거래로 의심되는 대법원 판결로 뒤집어졌다.

발레오만도 노조 조직형태 변경 사건도 마찬가지다. 2015년 7월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협력 사례’ 문건에는 대법원이 심리 중이던 ‘발레오만도 노동조합 조직형태 변경 사건’이 등장한다. 문건은 이 사건 결론이 향후 노동조합 운영 방식에 큰 파급력을 줄 것이라고 밝혔다. 이 문건이 만들어진 직후 박 전 대통령과 양 전 대법원장의 청와대 회동이 이뤄졌다. 그리고 2016년 2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노조 손을 들어준 원심 판결을 뒤집었다.

일부 고위법관에 비민주적 사고방식

이 칼럼도 그렇지만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에 대해 ‘재판거래’란 말을 쓰고 있다. 엄밀히 따져보면 어불성설인 말이다. 혼탁한 정치판에서 정치거래란 말은 성립한다. 범죄 수사 기법상 유죄답변거래(Plea Bargaining)도 있다. 하지만 재판과 거래는 상극이다. 양승태 대법원은 그것을 사법부에서 일상적으로 저질렀다. 상고법원을 성사시킨다는 미명 아래였다.

법관은 국회의원이나 검사와는 다르다. 최소한 달라야 한다고, 윤리적 염결성이 있어야 한다고 많은 국민은 믿고 있다. 그만큼 실망도 크다.

지난 세월 사법부가 정권에 굴종하고 영합해 독재를 연장시키는 역할을 한 때가 있었다.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거래도 그런 측면이 있다. 일부 법원장급과 대법관들이 보이는 비민주적 사고방식에도 유신시대의 상흔이 남아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2018-08-10 08:57:24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