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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칼럼

[신문로] '대표선수'가 중요한 까닭

일본의 반응은 예상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자국이 저지른 역사적 과오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태도 말이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중대한 흠결이 있었다고 문재인정부가 밝히자, 일본은 아베 신조 총리, 고노 다로 외무상 등이 일제히 나서 '변경 불가'를 외치고 나섰다. 아베 총리는 "(기존 합의에서) 1㎜도 움직이지 않는다"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이런 '단호함'은 곧잘 독일과 비교된다. 그것을 입증하는 역사적 장면이 있다.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 유태인 희생자 위령탑 앞에 선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헌화 중 털썩 무릎을 꿇었다. 비에 젖은 차가운 바닥에 꿇어앉은 채 묵념했다. 나치에 희생된 폴란드 유태인에게 보낸 진심어린 사죄였다. 그는 훗날 이 돌발행동에 대해 "나는 인간이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무릎 꿇고 참회하는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



브란트만 사죄한 게 아니다. 독일은 역사적 과오에 대해 끊임없이 반성하고 있다. 2005년 총리에 오른 앙겔라 메르켈은 틈나는대로 나치의 반인륜적 만행을 비판하며 독일이 영구적으로 책임져야 할 문제라고 말한다.

일본은 정반대다. 틈만 나면 과거사를 부정하고 미화하려 한다. 식민지배나 침략 전쟁, 반인륜적 범죄,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해 단 한 차례도 진솔하게 사죄한 적이 없다. 드문 예외가 1993년 고노 담화다. 고노 요헤이 당시 관방장관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군의 관여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2014년 이 담화를 사실상 부정했다. 고노 요헤이의 아들이 현 고노 다로 외무상이다. 과거사에 관한 한 일본 정부의 파렴치성은 '상수(常數)'적 성격이다.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는 말도 된다.

일본은 '과거'에 대한 진솔한 반성 없어

의아한 건 우리 측이 어쩌다 그런 일본에 말려들었냐이다.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비판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쪽에는 무슨 문제가 없었는지도 성찰할 필요가 있다.

원인은 조급증이었다. 2015년 12월 위안부 합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안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위안부 문제 해결 없이는 일본과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초강경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지속가능한 게 아니었다.

여기에는 미국이 중대 역할을 한다. 미국은 자국의 아시아재균형 정책에 주는 부담을 우려해 한·일관계 개선을 촉구했다. 한국은 일본과 위안부 문제를 조속히 타결해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박 전 대통령의 선택은 '위안부 문제를 해결했다'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협상을 서두르는 것이었다.

과거사에 둔감한 일본의 문제는 별개로, 우리도 대표선수를 잘못 뽑았다. 경기를 하거나 협상을 하거나 우리는 대표선수를 뽑는다. 다음달 평창에서 개막하는 동계올림픽에 출전하는 각국 선수들은 국가대표라고 불린다.

 

 

 

위안부 합의에 중대한 흠결이 있었다는 한국 정부의 방침을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아베 일본 총리



그런데 올림픽 국가대표와 위안부 협상대표는 성격이 좀 다르다. 올림픽 대표는 훈련 중 쏟은 땀과 경기 당일의 정신력이 중요하지만, 위안부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려면 좀 더 심원한 역사인식과 철학이 깔려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정치적 합의'로 협상을 타결하는 데 급급했다. 혹자는 이 때문에 합의 당시 우리 외교부 수장이던 윤병세 장관에게 졸속 협상의 책임을 묻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윤병세는 '아바타'였을 뿐 그 뒤에는 박근혜가 있었다.

'아바타' 윤병세, 그 뒤에 박근혜

결과적으로 한국은 위안부 문제에 있어 일본의 기만 살려준 꼴이 됐다. 일본 외무성 간부는 "(한국이) 국가 간 합의를 너무 가볍게 보고 있다"고 했다. 고노 외상도 "전 정권이 한 것을 모른다고 한다면 한·일 간에는 어떤 것도 합의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형식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일본의 기고만장에는 분명 우리가 원인제공을 한 측면이 있다.

시민사회는 "이면합의가 존재했음이 밝혀진 2015년 합의는 쓰레기통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한·일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면서도 "정부는 합의 파기나 재협상 요구는 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어정쩡한 모습이다. 그 이유가 뭔지 숙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