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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칼럼

[신문로] 애국심의 두가지 얼굴

남재준 전 국정원장이 지난주 검찰에 출석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국정원 직원들은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마지막 보루이자 최고의 전사들이다."

그는 "그들의 헌신과 희생에 대해 찬사는 못 받을망정 수사를 받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참담한 일이 벌어져 가슴 찢어지는 고통을 느낀다"고도 했다.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고 믿고 싶다. 그 말에서 애국심이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2005년 육군참모총장으로 퇴임하기까지 30여년 간 군인의 길을 걸었다. 젊은 시절부터 소신있는 장교로 평가받았고 퇴역 후 박근혜정부 초대 국정원장에 발탁됐다. 그에게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청와대에 상납했다는 혐의가 씌워졌다. 그가 '정권이 바뀌니 정치공세의 희생양이 됐다'고 느낄 만도 하다.

이 대목에서 "애국심은 악당의 마지막 도피처"라고 악담을 한 새뮤얼 존슨이 떠오른다. 그가 문제 삼은 건 애국심 전반이 아니라 가짜 애국심이었다. 존슨은 애국자에 대해서도 "가짜 주화를 가려내듯 외관만 그럴듯한 가짜 애국자를 가려내야 한다"고 썼다. 

 

남재준 전 국정원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특수활동비를 상납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피의자신분 조사를 받기 위해 지난 8일 서울중앙지검으로 들어가기 전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존슨의 가짜·진짜 애국심 판별론은 남 전 국정원장에게도 적용된다. 평생 국가와 민족만 바라보고 살아온 것으로 알려진 그의 가슴에 담긴 애국심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만약 가짜였다면 '국가와 민족만 바라보고' 살아왔다는 그의 생각은 대단한 착각 내지 자기도취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를 포함해 전 정권의 요직을 맡았던 사람들은 모조리 부패 정치인이며 적폐 청산 대상이라고 몰아도 할 말이 없다.

애국심은 "악당의 마지막 도피처"인가

문제는 똑 부러지게 판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남 전 원장의 경우 '군인 출신으로 자기 신념이 강하지만 외곬수이며 무엇이 정의고 불의인지 모르고 살아왔다는 점' 등을 이유로 평가절하하는 시각도 있다. 반면 그의 애국심을 평가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그렇게 되면 사안은 순식간에 그렇고 그런 정치적 공방으로 변질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좋은 사례다. 돌이켜 보면 그의 투철한 애국심과 국가관·안보관은 거의 신화적 수준이었다. 2006년엔가 김무성 당시 한나라당 의원에게 어느 기자가 박근혜 전 대표를 지지하는 이유를 물었다. 대답은 "정치인들 가운데 박근혜만큼 애국심이 깊은 사람은 없다"였다. 그러면서 덧붙힌 말도 재미있다. "MB는 한참 뒤떨어진다. 자기 생각만 하고 산 사람 아닌가."

가짜·진짜 애국심을 판별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것은 계량화할 대상도 아니다. 최근 '백범일지'를 다시 읽으면서 느낀 것이다. 필자는 이번 칼럼을 염두에 두고 '애국'이란 단어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그런데 '애국'이란 말의 출현 빈도가 의외로 적었다. 텍스트 자체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내용이라 국가·민족·독립이란 말은 매우 자주 나왔다. 반면 '애국'은 400쪽에 가까운 전권을 통해 불과 10여차례만 나왔다.

                                                     백범일지

 

과문한 탓에 그 시절 '애국'이란 말이 얼마나 널리 쓰였는지는 모른다. 다만 백범은 전 생애 자체가 애국이었으니만큼, 구태여 그 마음을 '나라 사랑(애국)'이란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애국심의 역설이랄까. 진짜 애국자는 '애국 애국' 하며 노래 부르지 않는다. 고장난 축음기 노래처럼 '애국'을 되풀이해서 들으면 지겨워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진짜 애국자는 '애국' 노래부르지 않아

이런 저런 이유로 애국심은 훌륭한 덕목이란 자격을 잃고 있다. 애국심을 강조하다가 독선적이란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 지금도 우파 시민단체들은 단체명에 즐겨 '애국'을 집어넣어 짓는다.

따라서 '애국'의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언술을 피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장삼이사라면 신경 쓸 것 없으나 사회지도자급 인사라면 특히 그렇다. 애국심이 자칫 자아도취, 나아가 독선으로 빠지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지난 시절 우리는 그 폐해를 경험했다. 예컨대 블랙리스트, 화이트리스트 논란이다. 권력이 "이것만이 애국!"이라고 외치는 순간 독재와 파시즘이 어른거린다. 지난 세월 무분별한 색깔론을 정당화하는 데도 무고한 애국심이 동원되었던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2017-11-16 11:44:46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