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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칼럼

[신문로] 송민순 회고록을 '색깔론'으로 오해한 까닭

작년 가을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낸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가 '종북' 논란으로 번졌을 때, 처음 느낌은 의아함이었다. 색깔론은 보수우파를 가장한 극우세력의 전유물이다. 한데 특이하게 이번 색깔론은 원인 제공자가 노무현 정부에서 외교부 장관을 지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선거판에서 종북·색깔론의 파장은 무시 못 한다. 지난 대선 하루 전날 김무성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총괄본부장이 조작된 NLL(북방한계선) 포기 발언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낭독했던 걸 기억한다. 내 의아함은 '그런 사정을 모를 리 없을 송 전 장관이' 왜 그랬을까였다. 어디까지나 처음 느낌이 그랬다는 말이다.

회고록이 나오자 우파들은 기다렸다는 듯 유력 대선 후보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공격하고 나섰다. 정진석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노무현 정권과 그 수뇌의 행태는 정말 충격"이라고 말했다. 이장우 최고위원은 문 전 대표에게 신속한 정계 은퇴를 요구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전모가 하나둘씩 드러나던 시점이었다. 궁지에 몰린 집권당에게 송 전 장관의 '폭로'는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었다. 얼마나 충격적인 내용이 있길래 그럴까? 문제가 된 것은 책 12장 '시작만 있고 끝은 없는 대북정책'의 첫 절이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과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

 

"2007년 다시 북한인권결의안 표결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번에는 내가 외교부장관으로서 책임을 져야 했다. 1년 전에 심한 논쟁 끝에 대통령의 결정을 받아 찬성 투표했는데, 인권의 보편적 원칙은 물론이고 국가 정책의 일관성은 유지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 국정원장이 그러면 남북 채널을 통해서 북한의 의견을 직접 확인해보자고 제안했다. 다른 세 사람도 그 방법에 찬동했다. …한참 논란이 오고 간 후 문재인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 일단 남북 경로로 확인해보자고 결론을 내렸다."

최순실게이트 본격적으로 드러나던 시점

이것은 유엔 북한인권결의안에 찬성이냐 기권이냐를 두고 정부 내 이견이 있었음을 기술한 대목이었다. 송 전 장관은 결국 기권표를 던진 정부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썼다.

그래서 이 절에 붙인 제목도 '북한 인권, 흔들린 원칙'이다. 남북관계에 영향을 미칠 중대 결정을 놓고 정부 안에 이견이 존재했던 것도, 토론을 거쳐 대통령이 최종 판단을 내렸다는 것도 지극히 정상적인 민주 정부의 모습이었다. 대통령의 '레이저 광선' 눈빛으로 이견이 잠재워지는 비정상적 정부가 아니었다. 북한의 의중을 파악해 보았다는 것도 하등 문제될 게 없다. 따라서 송 전 장관은 책에서 색깔론을 펴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구 탓인가. 그가 며칠 전 CBS 라디오에서 한 말을 귀담아들어 보자. 그는 "이게 갑자기 색깔·종북론으로 비화했고, 그렇게 되니까 제 책이 잘못됐다고 (문 후보 측에서) 공격을 해왔다. 착잡하다"고 말했다.

그는 "문 후보께서 제가 쓴 책이 오류라고 수차 강조를 했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며 "책을 쓴 사람으로서 책이 온전하다는 것을 보고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한다"고도 했다.

문 후보 쪽은 어떤가. 그는 지긋지긋한 종북 프레임 공세에 시달려왔다. NLL 포기 발언 조작 때도 새누리당은 그를 겨냥해 "이런 정신 나간 노무현 대통령 정권의 2인자가 대통령이 되면 김정은에게 가서 똑같은 짓을 할 것"이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문 후보 캠프에서 "제2의 북풍 공작으로 선거를 좌우하려는 비열한 새로운 색깔론"이란 반응이 나온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분단국가에게 색깔론은 천형(天刑)

유죄는 색깔론 자신이다. 우리 안에 일상화한 색깔론이 소란을 만든 장본인이다. 남과 북이 소통한 것을 두고 북한의 '결재'를 받았다며 호들갑을 떤 색깔론이 문제였다.

처음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 대선에서 색깔론은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듯하다. 북한 주적 논란도 인권결의안 논란도 '찻잔 속 태풍'에 그칠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음을 푹 놓지 못한다.

유일 분단국가에게 색깔론은 그만큼 천형(天刑) 같은 존재다. 김승옥은 '염소는 힘이 세다'란 소설에서 "염소는 죽어서도 힘이 세다"고 썼다. 색깔론은 그런 염소처럼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운 것이다.

2017-04-28 11:27:5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