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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칼럼

[신문로] 미국 중심으로 '알아서 기기'

꽤 오래전, 그러니까 2004년 노무현정권 초기에 신문에 '알아서 기기'란 칼럼을 썼다. 나는 "한국 언론이 '대통령이 진노한 것으로 알려졌다'거나 '금일봉을 하사했다'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던 것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였다"고 말했다.

그런 게 권위주의 시절 권력자에게 '알아서 기기'를 하기 위한 표현인데, 이제 쓸 필요가 없게 됐다고 생각한 것이다. '대권' '통치권자' '가신' '친서' '읍소' '진언' 같은 왕조시대적 냄새를 풍기는 용어도 사라져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한참 옛날 쓴 칼럼이 불현듯 떠오른 건 최근 워싱턴발 기사를 접하며 느낀 기시감 때문이다. 그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사드 한국 배치를 둘러싼 논란에 '격노'했다"는 통신 보도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격노한 것으로 파악됐다"는 연합뉴스 1보


 

기사 리드(첫줄)가 "트럼프 대통령이 격노한 것으로 파악됐다"는 말로 끝난다. 앞서 말한 칼럼에서 쓴 '대통령이 진노한 것으로 알려졌다'와 판박이처럼 닮은 표현이다.

실로 오랜만에 만난 이 말의 뉘앙스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화를 냈다'도 '격노했다'도 아니고 '격노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쓴 심리 말이다. 남의 나라 대통령의 심기를 극도로 조심스럽게 살피는 태도가 담겨 있다.

이 기사는 그것 자체로도 신빙성에 문제가 있었다. 한 사람의, 익명의 한국 정부 고위관계자의 말에만 의존해 썼다는 점이다. 미국 언론에서 트럼프가 격노했다는 기사를 찾아볼 수 없었던 것도 그 방증이다. 물론 외신이 비슷한 기사를 쓰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잘못된 기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트럼프가 격노했다'는 말의 의미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 기사를 바탕으로 여러 국내 언론이 후속 보도를 했다. 그렇게 해서 '트럼프 격노 사건'은 일파만파로 확대재생산되었다. 언론은 트럼프의 '격노'가 마치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의 발언과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도했다.

때마침 워싱턴에 온 문 특보가 세미나에서 "북한이 핵 미사일 활동을 중단하면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축소할 수 있다"고 발언한 것이다.

 

 

6월 20일자 조선일보

통신이 최초 보도에서 트럼프가 격노했다고 밝힌 시점은 지난 8일이었다. 문 특보의 세미나 발언은 그로부터 8일 뒤인 16일 있었다. 그럼에도 상당수 언론은 교묘하게 두 사안을 뒤섞었다. 가령 시점을 밝히지 않은 채 트럼프가 격노했다고 쓰고, 그 다음 문 특보의 발언을 언급하는 방식이었다.

문 특보는 세미나 발언에 대해 '학자적 견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그것을 존중하는 게 마땅하다. 물론 그 견해에 공감하지 않는 언론이라면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비판은 이성적이며 상식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선후관계까지 무시하고 논리를 짜맞추려한 의도가 역력했다. 한 일간지 만평은 이런 행태를 두고 '트럼프님께서 격노하시었다' '한미동맹 다 깨진다'는 식의 호들갑스런 반응이라고 꼬집었다.

 

경향신문 6월 21일자 '장도리' 만평

이런 무리한 반응을 만들어내는 심리는 무엇일까? 필자가 썼던 칼럼을 조금 더 인용하는 걸 허용하기 바란다. "우리 사회의 '알아서 기기'는 현저히 극복됐다. 그러나 강대국이 개입된 대외문제로 가면 양상이 전혀 달라진다. 한국언론이 미국 정부나 언론보다도 앞서 국내 반미감정 확산이나 미군 재배치 우려를 제기하고 호들갑을 떠는 행태에는 필시 '알아서 기기'의 측면이 있다."

'한국 보수'에게 미국은 범접할 수 없는 영역

13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국적 보수' 세력의 미국 중심 사고에 큰 변화는 없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 그때의 반미감정 확산이나 미군 재배치가 이번엔 사드 배치 문제로 바뀌었을 뿐이다.

미국 관련 현안이 불거지면 '바람보다도 더 빨리' 미국 중심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트럼프가 격노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 진위나 경위를 따지기보다는 미국 편에 서 판단하게 된다.

이럴 때 딱 맞는 게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이란 말이다. '문재인정권에서는 한미동맹에 균열이 올 것'이란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있던 차에 문 특보가 좋은 먹이를 제공한 셈이다.

'한국적 보수'에게 미국은 '거대한 뿌리' 같은 존재다. 범접하면 안되는 성역이다. 전임 대통령이 탄핵됐고 정권교체까지 이뤄진 마당이다. 그럴수록 미국을 꼭 붙잡아야 한다.    2017-06-28 10:27:17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