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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칼럼

[신문로] 블랙리스트, 기름 빼고 뼈다귀 빼고

소설가 지요하씨는 지난해 10월 친구의 카톡 메시지를 받았다. 청와대가 문체부로 내려 보낸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명단 9473명에 관한 뉴스가 나왔는데, 거기에 지씨도 포함됐다는 것이었다. 그는 2015년 6월 세월호 시국선언 문학인 754명의 명단에 이름을 올린 적이 있다.

메시지를 아내에게 보여줬다. 아내는 "당신, 멋지네요, 축하해요"라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러다 정색을 하더니 "KBS 출연 섭외 왔던 게 취소될 것 같다"고 말했다. 아내는 지난해 여름 40년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임했다. 방송사에서 '감사패를 드립니다'란 프로그램에 출연해달라는 요청이 왔고, 추석 연휴가 끝나는 대로 구체적 촬영 계획을 짜기로 한 상태였다.


SBS 8시뉴스 2016년 12월 26일자 보도화면 갈무리



아내의 예감대로 방송사에서 연락은 다시 오지 않았다. 부부는 짐작하고 있다. 아내가 교사들의 시국선언에 이름을 올린 것, 또 지씨가 광화문 시국미사에 참례하고 시국에 관한 글을 많이 쓴 것이 문제가 됐을 거라고.

방송 출연이 블랙리스트 때문에 무산됐을 것이란 부부의 생각은 '합리적인 의심'으로 보인다. 그럴 만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와 언론 보도를 통해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배제'가 얼마나 대대적으로 이뤄졌는지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가 지요하

배제란 정부에 비판적인 사람들에 대한 재정 지원을 끊는다는 뜻이다.

과거 정권에서도 블랙리스트 논란은 심심치 않게 있었으나 이렇게 정권 차원에서 블랙리스트를 관리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박 대통령과 대기업 사이의 뇌물 수수를 최순실 게이트의 제1장이라고 한다면 블랙리스트 파문은 제2장이라고 할 만큼 엄청나게 폭발력이 큰 사안이다.

정부 비판하는 사람에 재정지원 끊어

사실 이번 파문에 '블랙리스트'란 말을 붙이는 데는 어폐가 있다. 우선 대상이 너무 많다. 수십, 수백명도 아니고 1만명에 육박하는데, 이건 정교한 분류가 아니라 마구잡이로 편을 가른 결과다. 가령 '우수도서' 선정과 관련해 국정원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진보 성향의 작가가 쓴 책들을 정부가 우수도서로 선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라고 돼 있다. 또 문체부는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은 순수문학'을 선정기준으로 제시했다.





문제는 진보 성향 작가나 순수문학이란 기준이 자의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공안기관과 정부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으로 판단할 여지가 크다.

지씨 등이 포함된 블랙리스트 명단 9473명은 세월호 시국선언 외에 세월호 정부시행령 폐기 촉구선언 594명, 문재인 지지선언 6517명, 박원순 지지선언 1608명 등을 합친 숫자다. 이는 이 정권이 단지 박 대통령에게 비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정부 예산집행대상에서 제외했음을 의미한다.

기준이 부실하니 지원 선정도 부실할 수밖에 없다. 우선 심사 기간이 턱없이 길어진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단체나 개인들의 작품을 걸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아르코(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화창작 기금은 길게는 219일까지 걸린 경우도 있었다. 예술계 한 관계자는 "누가, 무엇 때문에, 왜 되고 안 되는지 알 도리가 없으니 산하 기관, 단체들의 피로감이 극에 달해 있다"고 말했다. 국정원 보고서를 보면 작성자의 사고는 "진보는 악"이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공교롭게도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 편 가르기가 극심해졌고, 그러다가 출현한 것이 블랙리스트다.



지난해 10월 18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문화예술인 100여명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규명과 검열 반대 등을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과 박재동 화백 등도 자리에 함께했다. 사진=이치열 기자.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그 발상은 자기편이 아니면, 정부를 비판하면 곧 종북이고 빨갱이란 이분법적 비논리와 폭력의 연장선에 있다.

사회비평가 리영희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란 글에서 "그 모든 짓(사상 탄압)이 '좌'와 '우'라는 것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있으니 딱한 일이다. 어찌 이리도 유치할까?"라고 탄식한 바 있다.

이 글은 1988년 쓴 것이었다. 이번에 고은 시인은 블랙리스트 사태를 두고 "얼마나 구역질나는 정부인가"라고 했다.

창조도 문화예술도 갈 길은 포용이지 배제가 아니다. '기름 빼고 뼈다귀 빼겠다'는 사고로 무슨 문화융성인가. 며칠 전 문체부의 올해 주요 업무계획에서는 4대 국정기조였던 문화융성이란 표현이 사라졌다. 그런 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증좌다.

2017-01-11 11:35:2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