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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칼럼

[신문로] #그런데 김기춘은?


그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주범 급은 아니다. 그럼 종범일까, 아니면 요즘 흔히 쓰이는 문자로 '부역자' 정도일까. 어쨌든 그는 모종의 중대한 역할을 한 것 같다. 7일 국회 국정조사 특위 청문회에서 그는 다시 "최순실을 모른다"고 잡아뗐다. 박영선 민주당 의원이 제보받은 화면을 제시하자, "죄송합니다. 저도 나이가 들어서"라며 "최순실이란 이름은 못 들었다고 볼 수 없다"고 황급히 말을 바꿨다. 올해 77세인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얘기다.

대통령 탄핵소추안까지 통과된 시점에 내가 '그런데 김기춘은?'이라고 묻는 까닭이 있다. 그가 '다 떨어진 늙은이' 코스프레를 하고 있지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상징적 차원에서만 그렇다는 게 아니다. 유시민 작가는 며칠 전 '노유진의 정치카페' 공개방송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 일당과 어울려 공주놀이만 했다"고 말했다. 이어 "실제 국정운영은 누가 했나"면서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 비망록을 보면 유신 5공시대로 돌아가는 모든 역사적 퇴행이 김 전 비서실장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답했다.


네티즌 제보 동영상에 크게 당황하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 박영선 의원은 기세를 몰아 김종과 정윤회를 몰랐다는 그의 말을 반박하고 나선다. 오마이TV

 

따라서 박영수 특별검사는 앞으로 그가 관여한 것으로 의심되는 부분들을 철저히 밝혀내야 한다. 역설적으로 그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존재다. 흑역사 청산을 위한 반면교사로서 말이다. 어물어물 넘어가면 안된다.

비서실장을 1년 반 동안 지낸 그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까맣게 몰랐다"고 무능을 가장하는 모습이다. 그게 법망을 빠져나가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청문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대면 보고를) 일주일에 두번도 하고, 한번도 못 뵙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흑역사 청산을 위한 반면교사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그랬다는 게 어이없지만, 소통을 기피하는 대통령의 취향을 재빨리 간취해내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그의 이력은 무능과 거리가 멀다. 서울법대 3학년 때 사법고시에 합격해 검사가 됐다. 그런 머리로 '역사적 퇴행'을 선도했다. 김 수석의 비망록을 보면 그는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5·16에 대한 평가에 공통된 인식이 필요하다"면서 "애국심을 가진 군인이 구국의 일념에 일으킨 사건"이라고 5·16을 규정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도 깊이 개입했다. 국정화 물밑 작업과 관련된 그의 지시사항이 여러 차례 나온다.

유신헌법에 대해서도 "국력 결집과 남북대결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주장했다. 그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33세 검사 때 그는 유신헌법을 만드는 데 실무자로 참여했다. 그 뒤로 관운은 순풍에 돛단배였다.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3선 국회의원을 두루 지냈다. 2007년 한나라당 박근혜 후보 법률자문단장을 했고 2013년에는 대통령 비서실장에 기용된다.

이로써 유신독제체재의 기획자는 박정희 가문에 2대에 걸쳐 충성한 인물이 된다. 1974년 대통령 부인 저격사건을 잘 수사했다는 공로로 중정에서 가장 막강한 대공수사국장이 됐다. 유신체제 7년 중 4년 반 동안이나 이 자리에 있으면서 1975년 '학원침투 북괴간첩단 사건' 같은 고문 조작 사건을 지휘했다.

그를 평생 이끈 가치관은 무엇일까. 가치관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나, 나는 출세주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극우 색깔론자, 국가주의자, 지역주의자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출세라는 대의로 귀결된다.


1992년 12월 21일, '부산 기관장 모임' 사건과 관련 대통령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되어 서초동 검찰청사에 출두한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의 반시민적 가치관이 '헬조선' 만든 것

1992년 대선 직전 부산 초원복국집 사건에서 그의 가치체계를 읽을 수 있다. 법무부 장관에서 막 물러난 그는 지역 기관장들을 모아놓고 민자당 김영삼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지역감정을 불러일으키자고 말한다.

"우리가 남이가. (김영삼 후보를 당선 못 시키면) 영도다리에서 칵 빠져죽자." 이런 말도 한다. "안 해봐서 그런 거야. 장관이 얼마나 좋은지 아나, 모르지." 이 말들에는 지역주의 조장도 결국은 자기이익 추구, 출세의 방편이란 심리가 깔려있다.

인생 황혼 길에 선 그는 "이만하면 성공한 삶"이라고 자부할지 모른다. 족보에 올라갈 관직과 업적도 빵빵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반시민적 가치관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지옥 같은 사회, 즉 '헬조선'이 되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2016-12-12 11:29:33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