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대한민국의 국회는 무너졌습니다."
지난주 정세균 국회의장의 개회사에 반발해 본회의장을 박차고 나간 새누리당 의원들이 채택한 국회의장 사퇴 촉구 결의안은 이런 격정적 언어로 가득 차 있다. 결의안은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헌정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 정 의장은 국민 앞에 사죄하고 즉각 사퇴할 것"을 촉구했다.
결의안 문구가 옛날 운동권의 선언문을 방불케 해 흥미롭다. 결의안은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국회법 가치를 정면으로 훼손하며 당리당략을 택했다"며 정 의장의 '폭거'를 '규탄'했다. 전가의 보도인 색깔론을 빼면 섭섭했을까, "좌파시민단체나 할 법한 주장을 개회사에 담았다"는 비난도 넣었다.
실제로 개회사가 그렇게 호들갑 떨 만큼 당리당략적이고 좌파적이었나. 그 정도는 아니다. 상당히 온건하고 합리적이었다. 청와대 민정수석이란 검찰에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는 자리인데 우병우 수석이 직을 유지한 채 검찰수사를 받고 있는 것이 민망하다고 했다.
김영란법에 이은 '고위공직자 비리 전담 특별수사기관'의 신설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 사드 배치와 관련해 우리 내부에서의 소통이 전혀 없었고 주변국과의 관계도 깊이 고려한 것 같지 않다고 했다.
이 정도면 확산되는 국민적 우려를 전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 의장도 "국민의 목소리라고 생각하고 들어달라"고 했다. 사실 끝없이 '국민'을 호명해 피로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다. 그는 최근에도 이런 말을 했다. "매일같이 거친 비난과 항의를 받고 있지만, 저를 대통령으로 선택해준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비난도 달게 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
온건하고 합리적이었던 의장 개회사
국회의장의 당적 보유를 금지한 국회법을 내세워 '정치적 중립의무'를 위반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의적인 해석이다. 국회의장의 중립적 의사 진행과 정치적 소신을 혼동하면 안된다. 또 야당 당론과 비슷한 말을 하면 안된다며 개회사조차 여야 사이의 기계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과거 국회의장이 '얼굴마담'으로 불리던 시절에나 있을 법한 얘기다. 국회가 대통령과 행정부의 거수기 역할을 하던 시대는 지났다.
이정현 대표 등 새누리당 지도부가 2일 낮 국회의사당 정세균 국회의장실을 항의방문하려다 정 의장이 오찬 일정으로 나가고 자리에 없자 의장실 앞 복도에 앉아서 정 의장 사퇴를 촉구하는 팻말시위를 벌이고 있다. 오른쪽부터 이 대표, 정진석 원내대표, 조원진 최고위원. /한겨레 이정우 선임기자
새누리당의 소동에 대해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새누리당은 '야당 연습'을 하고 있는 거냐"는 반응을 보여 이채롭다.
그는 "개회사를 아침 10시 반에 미리 배포를 했는데 아무런 검토도 하지 않고 있다가 오후 2시에 낭독하니까 말썽거리로 삼는 건 얼마나 한심한 준비 안된 여당이냐"며 이런 진단을 내렸다. 새누리당이 청와대의 지시를 받고나서야 뒤늦게 항의 소동을 벌인 게 아니냐고도 했다. '야당 연습'이 얼마나 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나 여소야대로 바뀐 첫 정기국회에서 집단퇴장과 의장실 점거를 한 것은 확실히 여당답지 못한 '몽니'였다. 의장실 점거 과정에서 한선교 의원이 국회 경호원의 멱살을 잡은 사건으로 고발당한 것은 또 어떤가.
그 며칠 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한 첫 국회 연설은 이 당이 '박근혜당'임을 재확인케 하는 마침표 격이었다. 그가 현재 집권당 대표인지 대통령 비서인지를 헷갈리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국회연설에서든 어디서든 '주군'에 대한 충성심이 제 1순위인 이런 대표 아래서 정부를 견제하는 독립적 국회니, 수평적 당·청관계니 하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새누리당이 '청와대 여의도출장소'란 오명을 벗어나기조차 어려울 것 같으니 말이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나
이번 소동은 이런 아쉬움도 불러 일으킨다. 우리는 언제나 논리와 역량을 갖춘 정통 보수정당을 볼 수 있을까. 내가 말하는 보수정당은 진짜 보수적 가치를 중시하는 당이다. 틈만 나면 종북몰이 색깔론을 펴고 복지 확대라면 포퓰리즘이라고 경기를 일으키는 사이비 보수가 아니다. 보수층의 기득권만 보수하는 정당이 아니라 양극화 문제와 소매 걷어붙이고 씨름하고 나설 수 있는 정당이다.
현재의 새누리당이 그런 정당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난망이다. 이번 소동은 그런 체질적 한계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가끔씩 쇄신이니 개혁이니 해도,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는 게 아닌 것처럼 어렵다. 그렇다면 길은 하나, 야당이 되는 수밖에 없다.
2016-09-07 11:55:20 게재
'내일신문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문로] 트럼프, 미국신화의 최종 붕괴 (0) | 2016.11.14 |
---|---|
[신문로] 의사의 길, 지식인의 길 (0) | 2016.10.12 |
[신문로] 장관급 인사의 단식농성 (0) | 2016.08.08 |
[신문로] 풍전등화 국어의 미래 (3) | 2016.07.07 |
[신문로] 정의는 체념할 수 없는 것이다 (0) | 2016.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