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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칼럼

[신문로] 트럼프, 미국신화의 최종 붕괴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세계사적 의미가 있다. 물론 매우 부정적인 의미다. 금세기 들어 미국이 세계적으로 신뢰를 잃는 중대한 계기가 두 차례 있다. 하나는 9·11 테러였고 두번째가 바로 트럼프 당선이 될 것이다.

개인적 얘기부터 해보자. 내게는 미국 TV 드라마 '전투'에 대한 추억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본 이 전쟁 드라마는 언제나 흥미진진했다. '짜자자잔짜잔…' 하는 시그널 뮤직과 우직한 인간미를 풍긴 분대장 선더스 중사의 이름이 지금도 기억난다.

미군은 노상 연전연승, 독일군은 노상 졌다.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어린 마음에 "미국은 우리 편이고 따라서 좋은 편이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철들어 그게 '문화제국주의의 세뇌' 탓이었다는 걸 알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이라면 호의적이던 내 버릇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만큼 주변부에 대한 중심부의 문화적 지배력이 강력했던 탓일 거다.

 

15년 전 발생한 9.11 테러로 약 3000여명이 사망했다. 2001년 9월 11일 오전 미국 뉴욕의 세계경제무역센터 건물이 비행기와 충돌한 후 화염에 뒤덮인 모습./게티이미지


미국에 대한 환상이 깨진 결정적 계기는 2001년 9·11 테러였다. 뉴욕 쌍둥이 빌딩의 거대한 화염 속에서 악마의 형상이 보였다고 했을 만큼 묵시록적 사건이었다. 대통령 부시는 테러리스트들에게 보복하겠다며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부시를 지배한 것은 근본주의적 신앙이었다.

이 도착적 신앙에 따라 세계를 선과 악의 극단적 이분법으로 갈랐다. 이라크에는 알 카에다를 지원하고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둘 다 사실이 아니었다. 평화유지와 자위를 위한 전쟁만 허용하는 국제법도 깡그리 무시했다. 그 결과로 세계가 안전해지기는커녕 더욱 불안해졌다.

다양성과 마이너리티 존중 정신 부인

9·11은 발생 전과 후를 시대 구분할 만큼 세계사적 의미가 큰 사건이었다. 그 변화에는 미국의 위상 추락도 포함된다.

미국의 법치주의와 도덕적 진취성은 큰 상처를 입었다. 미국은 하이퍼 파워의 지위를 급속히 잃었다. 트럼프의 당선은 그나마 유지돼온 '미국 신화'를 최종적으로, 그리고 불가역적으로 깨뜨리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 같다.

필자는 진작부터 트럼프가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꺾고 대통령이 될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을 갖고 있었다. 양측의 선거전략 따위를 면밀히 분석해서 낸 결론은 아니었다. 부시에 이어 미국을 확실하게 망가뜨리는 데는 트럼프가 적임자라는, 주관적 '인상비평'의 소산이었다.

왜 그런가. 그가 미국이 애써 보전해온 가치와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에 앞장설 것을 공언했기 때문이다. 클린턴도 그다지 희망적인 대통령 감은 못됐다. 월가의 하수인이며 기득권자들의 벽을 깰 수 없다는 비판을 들었다. 그러나 그런 정도는 트럼프가 드러낸 막강한 문제들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미국의 중요한 가치관인 다양성과 마이너리티 존중의 정신을 부정하고 있다. '멜팅 포트(용광로)'와 '샐러드 보울(야채 그릇)'은 이 정신을 은유한다. 모든 민족적 구성원들이 자기 문화를 즐기며 개성 있게 살아가는 게 미국 사회다. 미국이 원래 이민자들이 뜻을 뭉쳐 만든 나라이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은 몹시 중요한 자리인데

우파 포퓰리스트로 분류되는 트럼프는 금융위기 뒤로 소외된 '앵그리 화이트(분노한 백인들)'의 정서에 파고들었다. 모든 잘못을 백인이 아닌 인종과 무슬림, 이민, 여성, 성소수자에게 돌렸다.

그 결과 미국 사회에 분열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벌써부터 "흑인 생명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미국을 다시 하얗게" "히잡과 스카프를 벗겨라" 등 주장이 횡행하고 있다. 트럼프는 부패 기득권세력 심판을 구호로 외쳤으나, 부동산 재벌로 성장한 그 자신도 지금 수많은 사기 등 사건에 연루돼 있다. 기후변화에 대한 인식도 "거짓말이다. 빙하기도 있었는데 그게 무슨 문제냐"고 반문할 정도로 거칠다.

미국은 '시스템의 나라'이므로 그가 취임하면 어느 정도 신중하게 대내외 정책을 추진할 것이란 시각도 있다. 그러나 한국도 그렇듯 국가 진로에 있어 대통령직은 몹시 중요한 자리다. 미국엔 부시라는 생생한 반면교사가 있었건만 시민들은 그걸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