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도어 작업을 하다 사고로 숨진 19살 김 모씨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이런 말을 했다. "내가 '회사 가면 상사가 지시하는 대로 책임감 있게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우리 사회는 책임감 강하고 지시 잘 따르는 사람에게 남는 것은 죽음뿐인데 애를 그렇게 키운 게 미칠 듯이 후회된다." 어머니는 탄식했다. "차라리 우리 애가 PC방 돌아다니고 술이나 마시는 아이였으면 지금 살아있었을 것이다. 집에 보탬이 되려고 끼니 걸러가며 시킨 대로 일하다가 이렇게 죽임을 당했다."
이 어머니의 탄식이 눈에 밟혀 이 칼럼을 쓴다. 그것이 잊고 있던 문제를 성찰케 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의는 손해 보는 장사인가'라는 문제다. 나는 여기서 정의를 '룰을 지키고 자기 책임을 다하는 성실한 행태'라는 포괄적 개념으로 사용하려 한다.
정의를 이런 개념과 동일시해도 큰 비약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는 2년 전 세월호 참사 때도 똑같은 질문에 맞닥뜨렸다. 그때 아이들은 어른들의 '가만히 있어라'란 선내 방송만 믿고있다가 희생됐다. 살 수 있었던 건 방송 지시를 안 따르고 선실 밖으로 나온 아이들이었다. 언제부턴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룰과 정의를 지키면 손해란 생각을 갖게 됐다.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 유경근씨가 김씨의 빈소를 찾았다. 숨진 자녀들은 1997년생 동갑내기들이다. 어머니는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한 저 때문에 죽은 거예요"라고 했고, 유씨는 "예은이에게 선원 말 잘 들어라, 방송 지시 잘 따르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떠났어요"라고 답했다.
서울 지하철2호선 구의역 스크린도어 수리도중 사망한 19살 김모씨를 추모하는 시민들이 2일 오후 사고현장인 구의역 9-4승강장에 모여 고인의 분향소가 차려진 인근 건국대병원 장례식장까지 행진을 벌일 예정인 가운데, 승강장 스크린도어에 시민들의 추모메모지가 빼곡하게 붙어있다. /오마이뉴스 권우성
"지시 잘 따르는 사람에게 남는 건 죽음"
나는 이들의 후회하는 심정에 깊이 공감한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 하는 아픔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결혼도 하고 인생의 행복을 채 누려보지 못하고 떠나버렸다. "둘째 아이에게는 절대 그렇게(책임감 강하고 반듯하라고) 가르치지 않겠습니다." 탄식을 넘어 절규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의 후회에 공감할수록 강렬하게 다가오는 역설적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이런 탄식이 나오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는 결코 체념해서는 안되며 체념할 수도 없다는 명제다.
왜 그런가. 이들 죽음의 성격 때문이다. 그 죽음 뒤에는 거대한 사회적·구조적 부조리와 불의가 도사리고 있다. 이 젊은이들은 그저 '재수가 없어' 숨진 게 아니다. 그 죽음은 명백히 사회적 죽음이다. 따라서 이 사회가 위로의 손길을 내밀고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세월호 때도 그랬지만 스크린도어 사고 뒤로도 기막힌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다. 사고 직후 서울메트로 측은 "보고를 안 하고 작업했다"며 김씨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했다. 정비노동자의 안전을 위해 2인1조라는 작업수칙이 있었으나 인력구조상 지켜질 수 없었다.
세월호 참사 뒤에 해피아가 있었다면, 구의역 사고의 배후에는 메피아(서울메트로+마피아)가 있었다. 하청 정비업체인 은성PSD에서 메트로 퇴직자 출신은 월 422만원을, 김씨 같은 비정규직 정비노동자는 144만원을 받고 일했다. 스크린도어 정비·관리라는 본연의 업무는 정비노동자들이 담당했음에도 주로 사무업무를 본 메트로 출신들이 훨씬 좋은 대우를 받았다. 결국 이번 사고는 국민 안전과 직결된 업무에 대해 안이하게 '위험의 외주화'를 하다 빚어진 것이다.
'위험의 외주화'하다 벌어진 참사
사고 뒤 일어난 애도의 물결도 그의 죽음이 사회적 죽음임을 증거한다. 자본과 권력이 갈수록 비정규직·파견직을 선호하는 현실에서 '나도 언제든 당할 수 있다'는 공감이 확산되는 것은 당연하다.
숨진 아들의 어머니는 시민 추모인파의 촛불행진에 대해 "감사합니다. 저도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살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오열했다. 이 장면은 연대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우리의 지난날은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좌절과 굴절을 겪어야 했다. 정의는 패배했고 기회주의가 득세했다"라는 말을 남겼다. 2003년 3.1절 기념사에서다. 이 말을 보수계 일각에선 패배주의적 역사관이라고 비판했지만 어불성설이다.
그가 말한 것은 우리 역사에서 정의가 패배한 부분을 직시함으로써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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