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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칼럼

[신문로] '예측불허'의 대통령을 보고 싶다

16년 만의 여소야대를 이룬 총선 결과를 두고 정치권과 언론이 수많은 논평과 보도를 쏟아냈지만 청와대는 조용했다. 총선 닷새만에 박근혜 대통령이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침묵을 깨고 말했다. "총선 결과는 국민의 민의가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민의를 겸허히 수용하고 국회와 긴밀히 협력하겠다."

곧바로 이번 칼럼의 주제가 떠올랐다. 칼럼 게재날짜를 통보받으면 며칠은 고민해 주제를 정했지만 이번엔 수월했다. 박 대통령의 '예측 가능성' 덕분이다. 예측 가능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다. 하나는 총선 패배에 대한 그의 언급이 예측 가능한 선이었다는 것, 또 하나는 앞으로도 무슨 예측불허는 없을 것 같다는 것이다. 이 생각은 어제 청와대에서 열린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오찬 간담회에서도 확인됐다.

박 대통령은 "…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한 문장에 '생각'을 두번이나 썼다. 굉장히 객관적인 화법이다. '유체이탈 화법'이란 말도 들었다. 노회찬 정의당 당선자가 어느 자리에선가 "대만 선거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고 촌평했을 정도다. 박 대통령은 평소 '비정상의 정상화'를 주창해왔거니와, 이런 화법을 쓴 건 지극히 비정상적이다. 그는 선거 전날까지 국무회의에서 국회 심판, 야당 심판을 독려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자신이 배신자로 찍은 유승민 의원을 끝내 공천에서 배제했다. 새누리당 상징색인 붉은 옷을 입고 투표했다. 혼신의 힘을 다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뚜껑을 열어보니 정작 '민의'로부터 심판당한 것은 대통령과 친박이었다. 충격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진심으로 민의를 생각할 줄 안다면 이런 결과에 대해 길든 짧든 사과와 반성부터 표시하는 게 정상이다. 그게 민의에 대한 예의다. 대통령은 초월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총선 패배에 대한 언급도 예측가능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그냥 관전평 하듯 딱 세 문장만 말하고 끝이었다. 국정기조도 통치스타일도 변화가 없을 거란 예고였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하면 이건 박 대통령으로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행태다. 평소 해오던 대로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여러 차례 유체이탈 화법을 써왔다. 지난해 메르스 사태 초기에 수수방관하다 뒤늦게 삼성서울병원장을 불러 질책할 때 그랬다. 세월호 참사 6일 후 열린 첫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사고원인을 따지며 선장과 승무원, 공직사회를 질타할 때도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일말의 자성도 볼 수 없었다. 성완종 리스트 파문으로 이완구 총리가 사의를 밝히자 "매우 안타깝고 총리의 고뇌를 느낀다"고 반응한 것도 그렇다.

박 대통령이 이렇게 예측 가능한 정치인이 된 이유는 두 가지라고 본다. 첫째는 공감능력 부족이다. 세월호 참사 초기 온 나라가 충격에 빠져 있을 때 그는 한치의 흔들림도, 감정표현도 없었다. 이것이 국가적 재난 앞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는 지도자의 모습이었을까. 당시 우왕좌왕했던 청와대의 행태로 볼 때 그건 부정적이다.

그보다는 국민과 유가족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정서적 유대가 부재한 모습이었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은 이를 '개인적인 트라우마 치료가 안된 결과'라고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박근혜는 칩거 18년을 방 안에서 요가하고 와신상담하며 버틴 사람이다. 2012년 초 SBS 힐링캠프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에게 이경규가 "드라마 같은 것도 보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드라마를 보면서 우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저게 뭐가 힘들다고, 난 더 힘들었는데…"였다. 이러니 세월호 참사로 통곡하는 모성에도 공감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한다.

아버지 박정희가 지배하는 정신세계

둘째는 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절대적 존재, 곧 아버지다. 그는 여러 차례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무한한 존숭의 마음을 밝혔다. 아버지가 가진 역사관, 안보관, 세계관을 듣고 배웠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가 아니라 선배이자 스승이며 나침반과 같은 존재"라고도 했다. 이렇게 자신을 아버지의 '분신'으로 여기는 듯한 박 대통령의 행태에서 아버지 시대의 데자뷰가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너무나 예측 가능한, 항상 정답이 나와 있는 대통령보다 때로는 파격적 변주도 구사할 줄 아는 '예측불허의 대통령'을 좀 보고 싶다.


2016-04-27 11:36:32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