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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칼럼

[신문로] 깜빡이를 켜자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한다." 진보 진영이 노무현정권의 우파적 정책을 비판하며 쓴 표현이다. 이명박정권 때는 우파들이 "우회전 깜빡이를 켜고 좌회전한다"고 못마땅해 하기도 했다. 자동차 깜빡이는 이처럼 정치 분석에 종종 사용된다.

중국에선 과거 이런 유머도 유행했다. 마오쩌둥을 태운 운전기사가 교차로에서 "어느 쪽으로 갈까요"라고 물었다. 마오는 "좌측 깜빡이를 켜고 좌회전하라"고 말했다. 덩샤오핑을 태운 운전기사가 같은 질문을 했다. 덩은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하라"고 했다. 이렇게 이념의 순결(紅)을 중시한 마오와 사회주의 속에서 자본주의를 지향한 덩의 실용주의를 풍자했다.

그러나 이 칼럼의 주제는 정치적 은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깜빡이(방향지시등)를 제대로 켜자'는 제언이다. 퇴직 후 필자의 중요 일과 가운데 하나가 2시간 이상 산보하기다. 걸으면서 느끼게 된 것이 차량들이 좀체로 깜빡이를 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가령 이면도로의 신호등 없는 작은 교차로에 차 한대가 정차해 있다. 문제는 이 차가 직진할 건지 아니면 내 쪽으로 좌회전할 건지 예측할 수가 없다는 거다.

요즘 차량들이 깜빡이를 잘 안 켠다는 건 통계자료로도 입증된다. 지난해 운전자들의 방향지시등 점등률은 66%였다. 교통안전공단이 전국 주요 교차로에서 좌회전 차량 8만여대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이 비율이 2004년에는 77.7%이었으니 10% 포인트 이상 떨어졌다. 근년에는 60%대에 머물고 있지만, 실제 체감 점등률은 이보다 훨씬 낮다.

방향지시등 점등률 66% 불과

큰 교차로에서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기다리는 운전자는 대략 20~30% 선이라는 게 여러 관찰자들의 증언이다. 차량의 정지선 준수율이나 안전띠 착용률 등 다른 항목은 상당히 개선된 것으로 조사됐다. 특이하게도 유독 깜빡이만큼은 사용률이 저조한 것이다.

 

교차로에서 좌회전하는 차량들. 방향지시등(깜빡이)을 켠 차량이 매우 적다.

 

 


 어째선가. 운전면허 시험제도가 부실해서라는 얘기가 있다. 얼마 전 경찰이 면허시험 강화 방침을 내놓기는 했지만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깜빡이 안 켜는 것도 엄연한 도로교통법상 교통법규 위반(범칙금 3만원)이란 사실에 대한 홍보가 덜 돼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근본적인 사회심리적 분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즉 깜빡이 켜는 것을 하찮은 일로 인식하게 만든 모종의 '한국적 특수성'이 작용했을 가능성 말이다. 매사에 정치적 함의를 찾아보려는 버릇이 발동한다. 깜빡이를 켜는지 안 켜는지 행위 자체는 완전히 비정치적인 것이건만.

그것은 준법·법치를 경시하는 풍토다. 한국사회의 특수성 가운데 하나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종이다. 근래 고위공직 후보자들은 위장전입, 병역비리, 부동산투기, 세금탈루가 '4대 필수조건'이 되다시피 했다. "민나 도로보데쓰(다들 도둑놈이다)."

법치니, 법의 엄정 집행이니를 떠드는 인사들의 이런 역겨운 행태를 보며 국민은 자기들만 희생과 복종을 강요당한다고 느낀다. 그런 와중에 '깜빡이 켜면 바보가 되는' 교통문화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차선를 바꾸려고 깜빡이를 켜면 뒷차가 바짝 붙여 끼어들지 못하게 한다. 차라리 깜빡이 포기 대열에 합류한다.

꽉 막힌 불통사회 상징하는 현상인가

자동차 왕국이라는 미국도 깜빡이는 문제다. 미국자동차공학회(SAE)가 2012년 차량 1만2000대에 대해 'Turn Signal Usage Rate', 즉 방향지시등 점등률을 조사해 보았다. 매우 낮았다. 차선변경 때는 52%, 좌우회전 때는 75%였다. 이 수치를 미국 전체로 따져보니 깜빡이 신호위반이 하루 20억 차례나 발생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재미있는 것은 위반 사유다. 42%가 '시간이 없어서', 23%는 '그냥 게을러서'라고 답했다.

국내 교통사고 가운데 교차로 등 깜빡이가 쓰이는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 1/3이 넘고, 그중 상당수는 깜빡이를 안 켜서 일어난다. 깜빡이를 안 쓰는 건 법규 위반 치고는 사소한 것이지만 그 후과는 결코 사소한 게 아니다.

도로 위에서 소통 수단인 깜빡이를 잘 안 켠다는 것은 꽉막힌 불통사회의 상징일 수도 있다. 온통 헷갈리는 신호들로 넘쳐나는 이 시대에 자동차 깜빡이라도 제대로 사용하는 습관을 갖는 게 어떨까.

 

2016-02-16 11:33:01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