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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칼럼

[신문로] 늙으면 보수화한다는 속설, 진실인가?

이상하다. 왜 이리 생각이 다른 걸까. 정부의 12·28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합의에 대한 평가가 40대 이하와 50대 이상 사이에 정반대로 나타났다.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60대 이상은 잘했다가 71.3%로 잘못했다(23.8%)를 압도했다. 50대도 50.9%대 38.4%로 긍정 평가가 높았다. 반면 20·30·40대는 잘못했다는 의견이 훨씬 많았다.

위안부 합의가 졸속으로 이뤄졌다는 건 며칠 전 아베 신조 일 총리가 "정부가 발견한 자료 중에서 군과 관헌에 의한 강제연행을 직접 보여주는 기술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또다시 주장한 것이 뚜렷한 증거다. 그러나 노인들의 단체인 어버이연합은 합의 철회를 주장하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대해 뜬금없이 "종북사상을 갖고 활동하는 단체"라고 비난한다.

 

   

지난 13일 서울 중학동 구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근처에서 어버이연합 회원들이 한일 위안부 합의 철회를 주장하는 정대협을 비난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이들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합의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이상하다고 했지만 고령층과 젊은층의 생각이 크게 엇갈린 것이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이미 수많은 사례가 있다. 2012년 대선에서는 50대 이상이 박근혜 후보에게 몰표를 던졌다. 50대 이상은 강고한 박 대통령 고정 지지층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세월호 참사나 메르스 사태, 국정원의 대선개입 등 무슨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져도 흔들리지 않는 지지를 보내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불린다. 그 비율은 대략 유권자의 30% 선이다.

왜 이들은 박 대통령에게 굳건한 지지를 보내는 걸까. 질문을 "왜 사람들은 늙으면 보수화하는 걸까"로 바꿀 수도 있겠다.

개인적 얘기를 해보자. 필자는 올해 우리 나이로 60줄에 들어선 퇴직자로서, 지난 대선 때는 현직에 있었다. 대선 직후 열린 대학 동창 모임에 가보니 박 후보 당선 결과를 비판하기는커녕 기뻐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알다시피 우리는 질식할 것 같은 유신시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이다. 그날 취한 한 친구가 이런 요지의 말을 했던 걸 기억한다. "왕년에 야당 아니었던 사람 있냐, 나이 먹으면 다 생각이 달라지게 돼 있다."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2007년 4월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캐피탈호텔에서 열고엽제전우회 총회에 와서 참석자들과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어버이연합과는 반대로 젊은 예술행동가 홍승희씨는 효녀연합이란 단체를 만들어 협상철회 및 소녀지키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 유튜브 영상은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다.

 

 

늙어서 괄시받는다는 상실감

그런 것일까. 사람은 젊어선 진보·좌파였다가 세월이 흐르면 보수·우파로 바뀐다는데, 여기엔 무슨 법칙성이라도 있는 건가.

노인의 보수화 현상은 꼭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한국 노인들의 보수화를 따로 설명할 수 있는 두개의 키워드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상실감이다. 노인들은 일제와 한국전쟁을 겪고 산업화를 주도한 세대다. 일부는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나이 들고 힘이 빠지면서 사회적 약자로 전락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노인빈곤율은 49.6%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았다. 2명 중 1명이 빈곤에 시달리는 셈이다.

평생 뼈빠지게 일했건만 늙어선 괄시를 받는다. 이렇게 낮은 삶의 질과 상실감이 보수화 성향을 부추켰다. 이론적으로는 열악한 삶의 조건들이 현상타파, 곧 진보를 지향하게 만든다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청년들이 현실을 '헬조선'이라고 개탄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체념적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편 노인들은 경로당 등에서 밤낮 접하는 종편 막장 시사프로그램 따위를 통해 '해박한' 시사 상식을 습득한다.

둘째 키워드는 독재의 상흔이다. 한국의 고령층은 젊은 시절 기나긴 독재를 경험했으며 그로 인한 깊은 정신적 상흔을 내면화했다. 박정희 독재는 무려 18년간 지속됐다. 장기 독재의 영향은 인간의 제도부터 잠재의식까지 상상을 넘어선다. 민주화를 통해 상처가 치유된 듯해도 그 상흔은 오래 남는다.

 


독재 경험으로 인한 정신적 상흔

스탈린 독재를 예로 들 수 있다. 러시아에는 아직도 소련이 초강대국이 된 것은 스탈린의 강력한 지도력 덕분이었다며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토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근대화를 이룩하고 가난을 벗어나게 해준 인물로만 기억하는 사고는 스탈린 향수의 한국적 버전이라 할 수 있다.

노년의 보수화가 이 글의 주제이긴 하지만, 만약 그 보수화가 젊을 때보다 균형감각과 지혜·경륜이 깊어진다는 뜻이라면 바람직한 것이다. 문제는 그런 보수화가 아닌, 극우·수구화라는데 있다. 사물을 외눈으로만 보는 보수화, 무차별적 종북몰이에 동원되는 보수화인 것이다.

곧 고령사회로 진입할 이 사회에서 이같은 노년 보수화는 우파 집권 장기화의 촉매가 될지도 모른다. 좀 비약하자면 억울한 노년의 상실감이 일당 지배체제의 항구화란 애먼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김철웅 언론인 전 경향신문 논설실장  2016-01-22 11:38:34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