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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칼럼

[신문로] 오역, 이 천박한 지적 풍토 언제까지

'시간의 존재를 위하여'란 말 들어보셨는가. 실존 철학자 하이데거의 명저 '존재와 시간'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다. 옛날에 신문사 선배에게 들은 얘긴데, 한 동료의 영어책 번역에서 심오하나 아리송한 구절이 보였다. 그게 '시간의 존재를 위하여'다. 원문을 찾아보았더니 'for the time being(당분간)'이었다. 예로부터 국내 번역물 오역 문제는 심각했다. 오늘날엔 좀 나아졌을까. 아닌 듯하다.

이 실상을 확인시키는 사례가 있었다. 미국 프린스턴대 앵거스 디턴 교수의 책 '위대한 탈출'을 둘러싼 왜곡 번역 논란이다. 2013년 미국에서 나온 이 책은 작년 9월 한국경제신문이 번역 출간했는데, 디턴 교수가 지난달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함으로써 더욱 주목받게 되었다. 출판사 한경은 이를 보도하며 "'위대한 탈출'은 불평등이야말로 성장을 촉발했으며 세상은 역설적으로 평등해졌다고 설득력 있게 입증했다"는 기사를 썼다. 이 때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책 목차 제목들이 대부분 바뀌었고, 원문의 내용 중 일부를 멋대로 생략했으며, 원문에 없는 것을 집어넣은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원저명은 '대탈출 : 건강, 부, 그리고 불평등의 기원'인데, 이것이 한글판에서는 '위대한 탈출 : 불평등은 어떻게 성장을 촉발시키나'로 바뀌었다. 자의적인 부제 변경이었다.



앵거스 디턴의 책 중 한국에서 유일하게 번역 출간된 <위대한 탈출> 표지        



그러자 한경은 "부제는 원제 그대로 살리고, 빠진 부분을 되살려서 완역본을 준비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러면서도 "왜곡의 의도나 시도는 없었다"고 말했다.

비문 많아서 읽다가 중도에 포기

이렇게 오역·왜곡 논란이 팽팽할 땐 저자 쪽 얘기를 들어봐야 한다. 프린스턴대 출판부의 대답은 "한국어판이 원저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않은 변경을 가한 채 출판됐다. 현재 나와 있는 책을 모두 회수해야 하며 새 번역본은 원문을 정확하게 살리고 독립적인 검토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판결’로 시비는 가려졌을까? 정규재 한경 주필은 칼럼에서 “책의 부제와 일부 제목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변형이 있었고, 이것이 ‘억지 시빗거리’가 됐다는 점은 유감이지만 그렇다고 디턴 경제학의 본질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스포츠건 번역이건 기본룰을 안 지키는 것보다 더 나쁜 건 이를 정당화하려고 이렇게 궤변을 늘어놓는 경우다.

 


 

    프린스턴대 출판부의 입장 발표 화면 갈무리


두번째 사례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에 관한 것이다. 대니얼 카너먼은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심리학자다. 심리학과 경제학의 경계를 허문 행동경제학을 창시한 그는 2011년 이런 연구결과를 묶어 '빠르고 느리게 생각하기(Thinking, Fast and Slow)'를 냈다.

이 책은 인간이 얼마나 '비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연구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나는 '생각에 관한 생각'(2012, 김영사, 이진원 옮김)이란 독특한 제목의 번역본을 읽다가 중도 포기하고 말았다. 모호한 번역과 비문이 괴롭혔기 때문이다. 미국에 원서를 주문해 다시 읽으면서야 허다한 오역과 자의적 생략 부분들이 괴로움의 원인이었음을 알았다. 인터넷 소감엔 "정말 어려운 책이었다. 500쪽 가량 되는 책을 한 달 동안 읽었다"는 것도 있었다. '그럴 수밖에'란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심각한 번역 부조리는 중역(重譯), 특히 면면히 이어지는 일본어판 베껴쓰기다.

나는 최근 미하일 숄로호프의 대하소설 '고요한 돈강'(1987, 동서문화사, 맹은빈 옮김)을 읽으며 잘못된 번역본 선택을 크게 후회했다.

일본어판 베껴쓰기 풍토도 여전

소설은 돈 강 유역 카자크(Kazak) 민족이 혁명 와중에 겪는 내전과 사랑의 장대한 드라마다. 그러나 번역은 시작부터 카자크를 카자흐로 잘못 표기한다. 둘은 전혀 다른 나라·민족으로, 중대한 혼동이다. 또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플레하노프는 '프레하노프', 칼므이코프는 '카르므이코프', 지명 스타브로폴은 '스타브로포리'란 일본식으로 표기됐다. 이런 문장도 있다. "테에로(육체)는 망가지기 쉽고, 데에로(사건)는 잊혀지기 쉽지." 이 역시 러시아어 '쩰로'와 '젤로'의 일본식 발음으로 보인다.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토대로 한 동명 소련 영화(1957)의 한 장면. 혁명과 내전의 혼돈 속에서 남녀주인공 그리고리(왼쪽)와 아크시냐는 뜨겁게 사랑한다.



이런 오역, 왜곡, 중역은 누가 뭐래도 원작 훼손이자 독자에 대한 모욕이다. 크게 보아 '시간의 존재를 위하여'와 도긴개긴이다. 문제는 원문과 대조해 잡아내기가 쉽지 않은 점을 노린 상혼이 판치는 거다. 이런 현실이 부끄럽다. 이건 좌나 우의 이념문제도 아니다. 이 사회의 문화수준이 요즘 문자로 굉장히 '비정상'이란 자괴감을 갖게 만든다.

김철웅 전 경향신문 논설실장  2015-11-25 11:50:56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