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는 노래를 잘 불러야 한다. 그런가. 당연하지만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은 말이다. 가수 2명의 경우를 살펴보자. 조용필은 자신의 ‘득음’ 과정에 대해 이렇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어느 여관에선가 TV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어느 장면에서 <한오백년>이란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깔려 나왔다. 나를 소름 끼치도록 전율시켰던 그 처연하고도 구성진 소리. 그 길로 뛰쳐나가 판소리 음반을 닥치는대로 샀다. 미성의 한계를 판소리로 극복하고자 했던 나는 방문을 걸어잠그고 뼈를 깎는 ‘소리독공’에 들어갔다. 폭포수 밑에서 ‘득음’ 한다는 명창을 흉내내 산과 사찰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계속 악을 쓰자 목이 가렵고 토악질이 났다. 소금을 먹으며 목의 열을 식혔다. …고행길에 들어선지 6개월. 더 이상 목이 간지럽지도 않고 구역질이 나지도 않았다. 목이 트인 것이다. 그렇게 부러워하던 허스키 보이스. 미8군 무대를 전전하면서 내 것으로 포섭한 다양한 창법 위에 이를 악물고 갈고 닦은 우리의 창은 내 목소리를 미성에서 구성진 탁성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주1】
김창완
다음은 밴드 산울림 보컬이자 리더 김창완에 대한 빛과 소금 멤버 장기호의 평가다. “음악을 하면서 가창력 있는 노래만이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고 가창력은 가창력일 뿐 감동은 또 다른 데 있다는 것을 깨달았죠. 예를 들면 산울림의 김창완 선배를 봐도 그렇게 노래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분만의 감정과 분위기가 있거든요. 목소리는 그것 자체가 하나의 악기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주2】
첫 번째 글은 조용필이 1970년대 중반 대마초 파동에 연루돼 77년 장충체육관에서 은퇴쇼를 하고 가요계에서 떠나야했던 시절을 회고한 것이다. 그는 그때 좌절하지 않고 판소리 창법을 터득함으로써 위기를 기회로 살렸다고 썼다. 하지만 그는 한참 뒤 후배가수 이승기가 “득음을 위해 피를 토하는 수련을 했다고 하던데”라고 질문한 것에 대해선 “과장이다. 목에서 피가 나면 큰일난다”고 해명하기도 했다.【주3】
여기서 얘기의 본질은 진짜 목에서 피가 났는지 여부가 아니다. 중요한 건 가왕(歌王) 칭호가 어색하지 않은 조용필이 좋은 목소리를 내기 위해 기울인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확인케 하는 부분이다. 그런 노력과 지속적 관리 덕택일까, 그는 사실상 모든 음악스타일을 아우르는 히트곡을 갖고 있다. <고추잠자리>(1981·김순곤 작사, 조용필 작곡), <못 찾겠다 꾀꼬리>(1988·김순곤 작사, 조용필 작곡), <여행을 떠나요>(1985·하지영 작사, 조용필 작곡) 등은 록이다. <단발머리>(1980·박건호 작사, 조용필 작곡)은 뉴웨이브 스타일, <창밖의 여자>(1979·배명숙 작사, 조용필 작곡), <그 겨울의 찻집>(1985·양인자 작사, 김희갑 작곡)은 팝 발라드 형식이다. <돌아와요 부산항에>(1976·황선우 작사 작곡), <일편단심 민들레야>(1981·이주현 작사, 조용필 작곡), <허공>(1985·정욱 작사, 정풍송 작곡)은 트로트다. <친구여>(1983·하지영 작사, 이호준 작곡)는 포크로 분류할 수 있다. 그는 <한오백년>, <강원도 아리랑> 같은 민요도 불렀다.【주4】
그러나 두 번째 글, 김창완에 대한 평가는 노래에는 가창력 말고도 중요한 ‘플러스 알파’가 있음을 얘기하고 있다. 이는 장기호 개인의 의견이긴 하지만 객관성이 있는 언명이라고 본다. 김창완을 좋아하되 그 이유로 그의 뛰어난 가창력을 꼽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창완도 자신이 노래 잘하는(가창력 있는) 가수가 못된다는 지적에 대해 불쾌해할 것 같지도 않다.
가창력(歌唱力)은 사전적 의미가 ‘노래를 부르는 능력’이다. 그렇다면 ‘가창력이 있다, 좋다’는 표현은 ‘노래를 잘 부른다’는 말과 차이가 없다. 한데도 가수를 평가할 때 종종 가창력이란 말을 가져다 쓴다. 그러나 이게 굉장히 포괄적이며 모호한 개념이기 때문에 쓰는 사람에 따라 담는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가령 “그 가수 노래는 굉장히 잘하지만 가창력이 좋은 가수는 아니다”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헷갈리는 표현이다. 그는 아마도 가창력이 좋다는 의미를 노래의 테크닉적인 측면(성량, 음역, 기교 등)에서 뛰어나다는 의미로 쓴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가창력을 테크닉보다는 공감과 감동을 전하는 힘에 초점을 둔다. 그게 진짜 가창력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 뜻은 백팔십도 달라진다.
나는 ‘노래가 위로다’라는 큰 주제로 칼럼을 쓰고 있지만, ‘노래를 잘 부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딱 꼬집어 말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노래를 잘 한다는 건 작사·작곡을 잘 하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작품이 아무리 좋아도 그걸 노래가 소화해내지 못하면 말짱 허사다. 이는 음악의 중심이 작품에서 연주, 가창으로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이걸 포괄적으로 연행(演行·
김현식 <내 사랑 내 곁에>
요절한 가객(歌客) 김현식의 가창력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만하다. 음악평론가 여인협은 “그는 가창의 이단아적 존재였다”고 말한다. 그가 타고난 노래꾼인건 맞지만 세간에서 말하는 가창력이란 통념으로 재단이 가능한 가수가 아니란 거다. “정확한 음정, 칼 같은 박자 감각, 풍부한 성량과 같은 가창력에 대한 기준은 그의 솔직한 노래 앞에 모조리 설득력을 잃고 만다. 그에게는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그만의 곡 해석력이 있었다. 동아기획의 김영 사장은 그것을 ‘어떤 음악이든 그럴듯하게 부르는 능력’이라고 언급한다.…그렇게 혼을 쏟아낸 절창이 바로 사후 발표작 6집에 수록된 <내 사랑 내 곁에>(1991·오태호 작사 작곡)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여기에서 그는 발음 하나까지 힘겨워하고 결국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그럼에도 듣는 이의 마음을 헤집어놓았다.【주5】
가창력 얘기를 하다보면 성악과 가요 창법은 뭐가 다른지 궁금해진다. 이건 전문 영역이므로 상식 수준에서 말하자면 둘은 추구하는 소리나 호흡법, 표현 기교가 다르기 때문에 뚜렷한 차이가 있다. 성악을 전공한 트로트 가수 박현빈이 때때로 가곡을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평소 트로트를 부를 때에는 볼 수 없던 자세와 호흡, 성량이 느껴지기도 한다. 성악은 복식호흡을 이용하여 마이크나 별다른 음향장치가 없어도 관객석 구석구석 또렷한 노랫소리를 전달한다. 바이브레이션도 호흡과 공명으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이지, 턱이나 입술을 떨어서 내는 것이 아니다.
반면 대중가요에서는 음의 떨림을 인위적으로 빚어내기도 한다. 또 전형적인 호흡법이나 발성법이 정해져있다기보다는 곡의 분위기나 스타일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소리를 낸다. 마이크 등을 사용하기 때문에 소리가 왜곡되지 않을 정도의 공명만으로도 충분한 표현이 가능하다. 대화를 할 때 사용하는 음성에 그대로 선율과 가사를 붙이는 자연스러운 진성 발성법이 사용되기도 한다.【주6】
대중가수 중에서도 성악 발성을 쓰는 가수들이 꽤 있다. 본인들이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는 건지는 확인 못했으나 가령 <이별이래>(1987·박건호 작사, 최종혁 작곡)를 부른 유열, <기도>(1979·서활 작사 작곡)를 부른 홍삼트리오가 그런 느낌을 준다. 흔히들 벨칸토 창법이라고 하는 두성 발성을 쓴 것 같다. 1979년 1회 강변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기도>는 클래식한 창법에다 사촌 형제들로 이루어진 트리오의 화성이 압권이었다. 가요도 목소리를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낼 때 큰 울림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홍삼트리오 <기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그리움에 불러보는/ 아픈 내 가슴속에 맺힌 그녀
나 언제나 한숨지며 그리워 할 때/ 성모앞에 드리는 기도
내님의 소식 전해주소서/ 가버린 님 언제나 오시려나
그리워 (그리워) 지친 마음 (지친 마음)
오늘도 (오늘도) 기다리네
아 아 아 아 기다리네…(하략)
<기도> 가사
그럼에도 현실적으로는 가창력이 매우 폭좁게 인식되고 있는 듯하다. 가창력을 폭발적 열창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가수가 혼신을 다해 열정적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물론 아름답다. 하지만 모든 노래를 그렇게 불러야 하는 건 아니다. 아까 김창완의 가창력 얘기를 했지만 만일 그가 <아니 벌써>(1977·김창완 작사 작곡)를 혼신을 다해 부른다면 전혀 어울리지 않을 거다. 노래는 자기에게 맞는 노래를 자기 색깔로 부르는 게 아름다운 거다. 그런데 요즘은 고음이 폭발해야 “노래 좀 하는군”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풍토가 일반화하고 있다. 여기에는 ‘불후의 명곡’이나 최근 재개된 ‘나는 가수다3’ 같은 방송사들의 서바이벌 가요 프로그램도 일조하고 있다. 이런 프로가 대형 기획사와 아이돌 중심으로 왜곡된 방송과 음반시장에 활력을 불어넣는 요소가 되는 것은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가창력과 고성 일변도를 동일시하는 쪽으로 몰아가는 것은 문제다. 의도했든 안했든 말이다.
나는 ‘불후의 명곡’을 시청하면서 한 가수가 열창을 하면 다음번 무대에 오른 가수는 그보다 더 자극 강도를 높여야 살아남게 되는, 말하자면 ‘자극의 에스컬레이션’ 딜레마에 빠지는 게 아닌가 생각해본 적이 가끔 있다. 그런데 이번에 가창력 주제의 글을 쓰려고 자료를 살펴보니 ‘나는 가수다’가 이미 시즌 1부터 ‘나는 악쓴다’로 둔갑했다는 비아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더 악써야 살아남는다”는 것. 물론 지나치게 냉소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가요는 작품이든 창법이든 다양한 게 좋으며 어떤 획일성도 적이란 관점에서는 경청할 필요가 있는 지적이다.
‘나가수1’ 당시 캐스팅 논란도 있었는데, 신해철은 트위터를 통해, 섭외가 들어온다면 ‘가수가 아닌 걸로 합시다’라며 우회적으로 출연 고사를 밝혔다고 한다. 그러자 예의 가창력 시비가 붙었단다. 여기에 대해서는 ‘바람을 가르다’란 블로거의 글 ‘나는 가수다 신해철, 섭외 거절은 가창력 때문?’ 일부를 소개한다.
“신해철에 대한 네티즌의 비난은 프로그램이 가진 한계를 드러낸다. ‘나는 가수다’는 가창력의 개념에서 승부를 겨룬다. 그러나 가수를 ‘Singer’와 ‘Musician’으로 나누면 얘기는 달라진다. 대중이 가수에게 소비하는 것은 가창력이 다가 아니다. 가수가 표현하고 부르는 만들어진 노래까지 포함된다. 음악이란 큰 틀에서 완성된 곡을 멋지게 소화한 가수로 인해 대중은 희로애락을 경험한다. 물론 신해철의 가창력이 ‘뛰어나다’ 혹은 ‘뛰어나지 않다’는 개개인이 느끼고 평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꾸준히 앨범을 내고 활동한 가수 신해철의 능력을, 듣는 이에 따라 모호한 기준점이 형성될 수 있는 가창력의 단면으로 폄훼해선 곤란하다. 그것은 곧 가수가 가져야 하는 개성을 죽이는 비판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주7】나는 이 글이 김창완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그도 ‘Musician’이며 자유와 솔직함을 사랑하는 ‘Artist’일 것이므로.
신해철은 사후 출판된 ‘마왕 신해철’에서도 가창에 대해 보컬보다는 연주를 중시하는 생각을 밝히고 있다. “고백하자면, 아마추어 밴드 시절부터 보컬리스트는 밴드의 가장 ‘하바리’ 포지션이었으며, 나는 내가 어쩔 수 없이 보컬을 겸하고 있는 뮤지션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나는 여전히 음정, 박자가 정확한 보컬리스트들을 은근히 경멸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노래를 잘한다고 말하는 기준을 혐오한다.”【주8】
노래한다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미국의 음유시인급 가수 폴 사이먼은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가끔은 노래 부를 때 이 목소리가 아니었으면 할 때도 있답니다. 하지만 제 목소리예요. 가리거나 은폐할 수가 없어요. 제가 부르는 노래에 제 목소리가 어울릴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바라게 되죠.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1969)가 그런 경우였어요. 제 목소리가 영 어울리지 않아서 아티(아트 가펑클)한테 부르게 했죠.”【주9】
김추자의 <늦기 전에>
노래는 혼신을 다한 열창도 있고, 음유시인의 잔잔한 읊조림도 있다. 물론 그 중간도 있을 거다. 김추자는 이렇게 말했다. “전 열 번 부르면 열 번 모두 다른 노래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때그때 조금씩 다른 미세한 감정의 결들을 따라 목소리도, 움직임도, 눈빛도 변하는 거지요.”【주10】이 말은 음악의 ‘박제’를 거부한다는 표현으로 들린다. 레코딩보다는 무대 위에서의 퍼포먼스를 중시한 댄스의 원조 디바답다.
장필순의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여성 포크 싱어송라이터 장필순은 말한다. “내 목소리에서 무엇을 느끼는가는 청자의 권리다. 난 노래할 때 최대한 감정을 빼는 편이다. 정직하게 노래하고 싶다. 그런 내 노래에 위로를 받는다면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 할 것 같다.”【주11】감정 전달의 방식이 청자 스스로 감동이 우러나오도록 하는 것, 절제를 통한 내면화 그런 걸 얘기한 듯 하다. 장필순은 ‘정직하게 노래하고 싶다’고 했는데, 김추자도 같은 생각을 말하고 있다. 다만 방법이 다른 거다. 어느 편이 더 가창력 있는 노래를 할 수 있을 것 같나.
【주1】경향신문 1998년 11월 13일자 27쪽 ‘나의 젊음 나의 사랑’ 조용필편 4(위기는 기회를 동반한다)
【주2】레전드 100 아티스트(한권의책, 2013) 빛과 소금 259쪽
【주3】2013년 8월 4일 ‘SBS스페셜-대한민국 가수 조용필’ 프로 중 조용필 인터뷰
【주4】레전드 100 아티스트(한권의책, 2013) 조용필 97쪽
【주5】같은 책 김현식 391쪽
【주6】월간객석 2014년 10월호 수록 이채은(자유기고가) 글
【주7】블로그 대중문화를 말하고 싶을 때 http://manimo.tistory.com/700 2011년 3월 6일
【주8】신해철 유고집 마왕 신해철(문학동네, 2014) 155쪽
【주9】대니얼 레비틴, 호모 무지쿠스(마티, 2009) 277쪽
【주10】레전드 100 아티스트 김추자 337쪽
【주11】같은 책 장필순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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