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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위로다

맨처음 고백·애인 있어요

 대학 때 배운 중급 러시아어 강독 책에 ‘중요한 대화(바쥐느이 라즈가보르)’란 글이 나온다. 사랑 고백 스토리다. 고백을 하기 위해 노심초사, 진땀 흘리는 심리 상태를 잘도 묘사했다.

                          ‘중요한 대화’ 삽화

 “오늘은 꼭 얘기할 거야.” 발로자는 다짐한다. 그런데 어디에서 해야 할까. 저녁 때 극장에 갔는데 표가 없다. “차라리 잘 됐어. 내가 사랑 얘기를 하려는데 영화에서도 사랑 얘기가 나오면 니나가 헷갈릴지도 몰라.” 카페로 간다. 내가 얘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 니나는 커피를 마시며 빤히 바라보기만 한다. 그러다 “새로 쓴 시가 있느냐”고 묻는다. 기회다. 발로자는 최근 쓴 연애시를 들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카페엔 손님이 많아 옆자리까지 시 낭송이 들릴 것 같다. 거리로 나온다. 날씨가 따뜻해 집까지 걸어가며 얘기를 하기에 딱 좋다. 한데 니나는 버스를 타고 가자고 한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걸음을 세기 시작한다. 하나, 둘,…열,…스물. 천이 되면 꼭 얘기해야지…. 니나가 “우리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고장이야”라고 말한다. 잘 됐어. 7층까지 걸어 올라가면서 얘기해야지.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작동되고 있었다. 불행한 저녁이다. 그러나 모든 게 내 생각처럼 꼬인 건 아니었다. 5층까지 왔을 때 엘리베이터가 서버렸다. 우리는 오랫동안 갇혀있었다. 그곳에서 마침내 나는 고백했다. 오래 전부터 사랑하고 있다고.

 사랑 고백은 일생일대의 사건이다.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청춘이 망설이고 가슴 졸이며 고뇌하는가. 고백하기까지 또 얼마나 숱한 밤을 뜬눈으로 지새워야 하나. 그런 영화나 소설 속 장면도 많다. 투르게네프의 소설 ‘그 전날 밤’(1860)에 나오는 고백 장면도 인상적이다. 러시아 귀족의 딸인 엘레나와 조국해방에 헌신하는 불가리아의 가난한 유학생 인사로프가 사랑에 빠진다.

 인사로프와 엘레나는 비 오는 날 교회 근처에서 마주친다. 인사로프는 자기 처지를 알기에 조용히 떠나려던 참이었다. 엘레나가 먼저 사랑 고백을 한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먼저 말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있군요. 자, 봐요, 내가 말했어요.” 이렇게 말하고는 그의 품에 몸을 던졌다. 한동안 껴안은 채 시간이 흐른다. 인사로프가 묻는다. “나와 어디든 갈 거야?” “이 세상 끝까지. 네가 있는 곳에 나도 있을 거야.” 인사로프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거지처럼 가난하고 러시아인이 아니란 점, 엘레나가 조국을 떠나야 할 것이며 많이 고생할 것이란 점, 여자 부모가 결혼을 승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 등 그들 앞에 놓인 문제점들을 열거한다. 여자는 대답한다. “그래, 다 알아…. 난 널 사랑해.” 그렇게 두 사람은 사랑 고백 장면에서 결혼 약속까지 일사천리다. 요즘 연애감각으론 터무니없지만, 우리도 사랑 고백을 청혼과 크게 다르지 않은 걸로 여기던 시절이 그리 먼 과거의 일도 아니다.

 러시아어로 이 대목을 읽으면 두 사람 대화 과정에서 ‘당신(브이)’이란 호칭이 어느 순간 ‘너(뜨이)’로 바뀌는 걸 관찰할 수 있다. 독어 불어도 그렇지만 러시아어 2인칭엔 반말과 존댓말이 구분되는데 사랑을 고백하면서 자연스럽게 반말로 바뀐다. 그걸 우리말로 옮기려니 좀 어색하다.

 사랑 고백 노래로는 송창식의 <맨 처음 고백>(1974·송창식 작사 작곡)이 고전적이다. 앞서 소개한 ‘중요한 대화’ 글의 발로자처럼 기회를 엿보며 조마조마 해하고 우물쭈물하는 남자의 심리가 더없이 잘 그려져 있다. 그러나 끝내 고백을 결행하지 못하고 있다. 요즘 문자로 참 찌질하다.

                                             송창식

 말을 해도 좋을까 사랑하고 있다고/ 마음 한 번 먹는데 하루 이틀 사흘
 돌아서서 말할까 마주 서서 말할까/ 이런저런 생각에 일주일 이주일
 맨 처음 고백은 몹시도 힘이 들어라/ 땀만 흘리며 우물쭈물 바보 같으니
 화를 내면 어쩌나 가버리면 어쩌나/ 눈치만 살피다가 한 달 두 달 석 달
…(중략)
 내일 다시 만나면 속 시원히 말해야지/ 눈치만 살피다가 일 년 이 년 삼 년
 눈치만 살피다가 지내는 한 평생
                                                <맨 처음 고백> 가사

   같은 앨범에 실린 <한 번쯤>도 비슷한 계열의 노래라 할 수 있다. <한 번쯤>은 송창식 노래 중 가장 대중적 성공을 거둔 노래에 속한다. 트로트풍의 리듬과 멜로디가 섞인 곡조가 친근하고, 앞에서 걸어가며 말을 붙여주길 기다리는 여자와 뒤따라가며 뒤를 돌아보기를 기다리는 남자의 입장을 코믹하게 묘사한 덕이다.

                                           김세레나                                                    

 사실은 이보다 훨씬 전에 끝내 고백을 못하고만 청춘 남녀를 그린 노래가 있다. <갑돌이와 갑순이>(1939·김다인 작사, 김부해 작곡)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 마을에 살았드래요/ 둘이는 서로 서로 사랑을 했드래요
 그러나 둘이는 마음뿐이래요/ 겉으로는 음음음 모르는 척했드래요
 그러다가 갑순이는 시집을 갔드래요/ 시집간 날 첫날밤에 한없이 울었드래요
 갑순이 마음은 갑돌이뿐이래요/ 겉으로는 음음음 안 그런 척했드래요
 갑돌이도 화가 나서 장가를 갔드래요/ 장가간 날 첫날밤에 달 보고 울었드래요
 갑돌이 마음은 갑순이뿐이래요/ 겉으로는 음음음 고까짓 것 했드래요 고까짓 것 했드래요
                                                    <갑돌이와 갑순이> 가사

 이 노래는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이 혼합돼 한때 대중음악의 주요 장르로 부상한 신민요다. 가사가 해학적이지만 음미해보면 자못 교훈적이기도 하다. 좋아하면서도 솔직히 고백하지 못하다간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된다는 것이다. 김세레나의 대표작으로 우리 귀에 친숙한 이 노래는 실은 1939년 발표된 원곡 <온돌야화>를 다듬은 것이었다.【주1】원곡 작곡자는 전기현(1909~1943?)으로 알려져 있다. 음악저작권협회엔 김부해(1918~1988) 작곡으로 나와있으나, 그가 <대전블루스>(1957·최치수 작사) 등을 작곡한 활동 시기가 1950년대부터란 점으로 미루어 그는 편곡자였던 것 같다. 김부해는 1965년 김세레나를 <새타령>(김부해 작곡)과 <갑돌이와 갑순이>로 데뷔시켰다.

 고백이 힘든 건 김동률이 부른 <취중진담>(1996·김동률 작사 작곡)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여기선 끙끙 앓기만 하지는 않는다. 그런 노래가 통하는 시대는 지났다. 비록 술기운을 빌려서이지만 고백을 결행한다. 사랑 고백도 진화하는 걸 보여준다고 할까.

 그래 난 취했는지도 몰라 실수인지도 몰라/ 아침이면 까마득히 생각이 안나 불안해할지도 몰라
 하지만 꼭 오늘 밤엔 해야 할 말이 있어/ 약한 모습 미안해도 술김에 하는 말이라 생각지는 마
 언제나 네 앞에 서면 준비했었던 말도/ 왜 난 반대로 말해놓고 돌아서 후회하는지
 이젠 고백할게 처음부터 너를 사랑해왔다고/ 이렇게 널 사랑해
 어설픈 나의 말이 촌스럽고 못 미더워도/ 그냥 하는 말이 아냐
 두 번 다시 이런 일 없을 거야/ 아침이 밝아오면
 다시 한 번 널 품에 안고 사랑한다 말할게

 자꾸 왜 웃기만 하는 거니 농담처럼 들리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린애 보듯 날 바라보기만 하니…(중략)
 어설픈 나의 말이 촌스럽고 못 미더워도/ 아무에게나 늘 이런 얘기하는 그런 사람은 아냐
 너만큼이나 나도 참 어색해/ 너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자꾸만 아까부터 했던 말 또 해 미안해/ 하지만 오늘 난 모두 다 말할 거야…(하략)
                                                                     <취중진담> 가사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이 노래 댓글엔 이런 사연이 있다. 중학교 때 짝사랑 한 여자아이에게 고 3때에야 고백을 한 적이 있단다. 결과는 거절이었다. 그렇지만 이 노래 덕분에 용기를 냈고 고백을 한 것에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댓글에 대해서도 ‘못해서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 후회하는 것이 낫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독특한 사랑 고백도 있다.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2005·최은하 작사, 윤일상 작곡)는 <맨 처음 고백>처럼 독백 형태의 고백이지만 그 고백은 훨씬 내밀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화자는 ‘애인 있어요’라고 해놓고 애인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그대’라고 털어놓는다. ‘그대’는 어지간히 무심한 성격인 듯 하다. 요즘도 애인 없이 지내냐고 묻고, 좋은 사람 소개시켜 주겠다고 한다. 그러니 화자는 가슴앓이를 하면서 ‘너무 소중해 꼭 숨겨두었다’고 독백하는 수밖에 없다.

                    이은미

<애인 있어요>를 이영현 버전으로 들어본다.

 아직도 넌 혼잔거니 물어보네요 난 그저 웃어요
 사랑하고 있죠 사랑하는 사람 있어요
 그대는 내가 안쓰러운 건가 봐 좋은 사람 있다며 한번 만나보라 말하죠
 그댄 모르죠 내게도 멋진 애인이 있다는 걸 너무 소중해 꼭 숨겨두었죠
 그 사람 나만 볼 수 있어요 내 눈에만 보여요 내 입술에 영원히 담아둘 거야
 가끔씩 차오르는 눈물만 알고 있죠 그 사람 그대라는 걸

 나는 그 사람 갖고 싶지 않아요 욕심나지 않아요 그냥 사랑하고 싶어요
 그댄 모르죠 내게도 멋진 애인이 있다는 걸 너무 소중해 꼭 숨겨두었죠
 …(중략)
 알겠죠 나 혼자 아닌 걸요 안쓰러워 말아요 언젠가는 그 사람 소개할게요
 이렇게 차오르는 눈물이 말하나요 그 사람 그대라는 걸
                                            <애인 있어요> 가사

 그러나 역시 고백은 고백이다. 시대가 달라졌느니 세대차니 따져도 본질은 변함없다. 태연이 부른 <만약에>(2008·송재원 작사, 김준범 이창희 작곡)는 거절에 대한 두려움 등 고백을 하고 난 뒤에 벌어질 일에 대한 번민으로 가득 찬 노래다.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만약에>란 제목이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만약에 내가 간다면 내가 다가간다면/ 넌 어떻게 생각할까 용기 낼 수 없고
 만약에 네가 간다면 네가 떠나간다면/ 널 어떻게 보내야 할지 자꾸 겁이 나는 걸
 내가 바보 같아서 바라볼 수밖에만 없는 건 아마도
 외면할지도 모를 네 마음과 또 그래서 더 멀어질 사이가 될까봐
 정말 바보 같아서 사랑한다 하지 못하는 건 아마도
 만남 뒤에 기다리는 아픔에 슬픈 나날들이 두려워서인가 봐
 만약에 네가 온다면 네가 다가온다면/ 난 어떻게 해야만 할지 정말 알 수 없는 걸
 …(하략)                                                <만약에> 가사

 고백 하면 보통 처음 하는 고백을 의미하지만, 이미 사랑에 빠져있는 사람도 표현을 달리해 ‘고백’할 수 있다. 이선희는 <알고 싶어요>(1986·양인자 작사, 김희갑 작곡)에서 “깊은 밤에 홀로 깨어 눈물 흘린 적 없나요/ 때로는 일기장에 내 얘기도 쓰시나요”라고 노래했다. 그가 내 얘기를 일기장에 썼다는 건 움직일 수 없는 사랑의 징표일 터인데, 사랑하면 그런 것도 궁금해지는 거다.

                                         이영현

 이영현은 <사랑은 이렇게>(2012·개미 태윤미 작사, 개미 작곡)에서 상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을 “어느 날의 너를 내 안에 채워가고”라고 노래하는데 절묘한 표현이란 생각이 든다.  분명한 건 사랑이 떠나가면 모든 게 끝난 거다. 그 마음을 이문세는 <붉은 노을>(1988·이영훈 작사 작곡)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난 너를 사랑하네 이 세상은 너 뿐이야/ 소리쳐 부르지만 저 대답 없는 노을만 붉게 타는데.”

【주1】김창남 엮음, 대중음악의 이해(한울, 2012) 한국 대중음악의 출발, 트로트와 신민요(이준희 집필) 2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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