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하면서 닮는다고, 미국 전 대통령 부시 유의 이분법적 사고를 비판하면서도 왕왕 이분법에 빠지는 나를 본다. “세상은 선과 악으로 나눠지며 나는 언제나 선이다.” 이게 이분법적이고 독선적인 부시식 세계관이다. 이분법적 세계관은 위험하다.
이분법에 익숙한 시각을 교정하는 데 유익한 기사를 9월14일자 이코노미스트지에서 읽었다. 이 잡지는 ‘종의 다양성’ 특집에서 “경제성장이 종의 소멸을 막는 데 기여한다”는 결론을 냈다. 성장과 보전이 늘 충돌하는 가치란 통념을 깬 것이다. 가령 한반도의 남한은 지난 수십년 동안 고속성장한 나라인데, 숲이 잘 보전된 편이다. 반면 북한은 숲이 1년에 2%씩 지난 20년 사이 3분의 1이나 사라졌다. 인간의 성장에 수반하는 과학적, 기술적 진보는 다른 종들에게 혜택을 준다. 40년 전에는 미국 하천의 3분의 2가 수영이나 낚시에 적합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3분의 1로 줄었다. 인간을 위한 하천 정화 작업 덕을 다른 종들도 본 것이다.
한 사회가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는 건 바람직한 진보의 방향이다. 한국 사회는 어떤 쪽인가. 도리어 강고해졌다고 본다. 송전탑 반대가 뜨거운 경남 밀양에서 이를 확인한다. 밀양 말고도 수많은 ‘밀양들’이 존재한다. 전국엔 송전탑이 4만기가 넘고, 밀양에서 문제가 된 76만5000V 초고압 송전탑도 902기나 된다.
며칠 전 한겨레신문 르포는 충남 당진화력발전소 부근에 사는 김금임씨(75·여)의 호소를 전한다. “개구리 소린지 도깨비 소린지, 웅~웅~ 하는 것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러워요.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은 특히 더해. 잠을 못 자겠어요.” 김씨의 텃밭 옆에 76만5000V 송전탑이 서 있다. 이 지역엔 1999년 송전탑이 들어선 후 암환자가 갑자기 늘어났다. 그럼에도 별도의 36만5000V 송전선이 또 들어올 예정이다.
그럼에도 시민사회의 ‘외부성’을 강조하는 데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그래야 “지역 주민들을 극단적 대치의 현장으로 떠밀고 있다”며 그 사람들을 불온시하기 쉽다. 평택 대추리, 제주 해군기지, 한진중공업·쌍용차 사태 때도 그랬다. 이번에도 통합진보당이 참여한 것을 빌미로 외부세력론이 종북세력 연계론을 넘나들고 있다. 극우들의 종북 이분법이 어른거린다.
밀양 고압 송전탑 공사에 항의하며 지난해 초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치우씨(74)의 동생 상우씨(73)는 잘라 말한다. “외부세력은 무신. 딴 데 사람들 아니면 우리가 막아낼 수 있나. 노인들 30명이서 경찰들이랑 일하는 사람들 우예 막노.”
또 다른 이분법은 도·농 간 차별이다. 우리는 대도시 전력공급의 책임을 지방이 모두 끌어안고 있다. 생산은 먼 지방 화력·원자력 발전소에서 하고, 소비는 대도시권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진다. 먼 데 전기를 끌어오기 위한 송전탑 또한 주로 지방 몫이다.
따라서 “그냥 여기서 살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송전탑 주변 주민들이 대안으로 땅속에 전선을 묻는 지중화를 해달라는 것은 매우 정당한 요구다. 한데 지중화에서도 도·농 간 불평등이 극심하다. 대도시에는 지중화 방식을 선택하는 반면, 지방에는 비용을 이유로 송전탑 건설을 하고 있다. 이것은 문명사회의 원칙이라 할 수익자부담 원칙에도 정면으로 위배된다.
경남도민일보는 어제자 사설 ‘밀양 송전탑 강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서 “원전비리라는 돌발적 사건이 불거지면서 송전탑 건설을 시급하게 강행해야 할 이유도 사라진 셈”이라면서 “도대체 누구를 위한 송전탑 건설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고 썼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도쿄대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가 제시한 ‘희생의 시스템’ 개념이 설득력 있다. 그는 일본 사회의 본질적 구조를 원전(후쿠시마)과 미·일 안보체제(오키나와)라는 ‘희생의 시스템’에서 찾는다. 여기에는 희생시키는 자와 희생당하는 자가 있다. 이 희생은 통상 은폐돼 있거나 공동체(국가, 국민, 사회, 기업 등)를 위한 ‘소중한 희생’으로 미화된다.
그의 이론을 빌리면 우리에게도 원전,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 고압 송전탑 등 ‘희생의 시스템’이 엄존한다. 그것은 희생을 부담지우는 쪽이 부담하는 쪽에 일방적 희생을 강요함으로써 유지된다. 이때 시스템 유지에 동원되는 게 단세포적 이분법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 줄거리는 신학교에 들어간 소년 한스 기벤라트가 내면세계를 지키지 못하고 파멸한다는 것이다. ‘수레바퀴’는 세상의 몰이해, 억눌린 삶을 은유한다. 밀양의 할머니들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다. 머리에 이고 살라고 세상이 강요하는 거대한 송전탑이다.
이분법에 익숙한 시각을 교정하는 데 유익한 기사를 9월14일자 이코노미스트지에서 읽었다. 이 잡지는 ‘종의 다양성’ 특집에서 “경제성장이 종의 소멸을 막는 데 기여한다”는 결론을 냈다. 성장과 보전이 늘 충돌하는 가치란 통념을 깬 것이다. 가령 한반도의 남한은 지난 수십년 동안 고속성장한 나라인데, 숲이 잘 보전된 편이다. 반면 북한은 숲이 1년에 2%씩 지난 20년 사이 3분의 1이나 사라졌다. 인간의 성장에 수반하는 과학적, 기술적 진보는 다른 종들에게 혜택을 준다. 40년 전에는 미국 하천의 3분의 2가 수영이나 낚시에 적합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3분의 1로 줄었다. 인간을 위한 하천 정화 작업 덕을 다른 종들도 본 것이다.
한 사회가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는 건 바람직한 진보의 방향이다. 한국 사회는 어떤 쪽인가. 도리어 강고해졌다고 본다. 송전탑 반대가 뜨거운 경남 밀양에서 이를 확인한다. 밀양 말고도 수많은 ‘밀양들’이 존재한다. 전국엔 송전탑이 4만기가 넘고, 밀양에서 문제가 된 76만5000V 초고압 송전탑도 902기나 된다.
며칠 전 한겨레신문 르포는 충남 당진화력발전소 부근에 사는 김금임씨(75·여)의 호소를 전한다. “개구리 소린지 도깨비 소린지, 웅~웅~ 하는 것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러워요.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은 특히 더해. 잠을 못 자겠어요.” 김씨의 텃밭 옆에 76만5000V 송전탑이 서 있다. 이 지역엔 1999년 송전탑이 들어선 후 암환자가 갑자기 늘어났다. 그럼에도 별도의 36만5000V 송전선이 또 들어올 예정이다.
충남 당진시 석문면 교로2리 마을 어귀에서 바라본 당진 화력발전소. 그 사이로 765kV 154kV 등 송전탑과 송전선로가 어지럽게 이어져 있다. /한겨레신문
‘밀양’에서 작동하는 첫번째 이분법은 외부세력론이다. 송전탑 문제는 지역문제인데 “왜 외부세력이 끼어드느냐”는 논리다. 그러나 송전탑 문제는 지역문제로 단순화할 일이 아니다. 에너지 정책, 인권·복지, 의료·건강 등을 아우르는 국가적 차원의 문제다. 따라서 힘없는 지역 노인들에게 연대의 손을 내미는 건 정당하다.
그럼에도 시민사회의 ‘외부성’을 강조하는 데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그래야 “지역 주민들을 극단적 대치의 현장으로 떠밀고 있다”며 그 사람들을 불온시하기 쉽다. 평택 대추리, 제주 해군기지, 한진중공업·쌍용차 사태 때도 그랬다. 이번에도 통합진보당이 참여한 것을 빌미로 외부세력론이 종북세력 연계론을 넘나들고 있다. 극우들의 종북 이분법이 어른거린다.
밀양 고압 송전탑 공사에 항의하며 지난해 초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치우씨(74)의 동생 상우씨(73)는 잘라 말한다. “외부세력은 무신. 딴 데 사람들 아니면 우리가 막아낼 수 있나. 노인들 30명이서 경찰들이랑 일하는 사람들 우예 막노.”
또 다른 이분법은 도·농 간 차별이다. 우리는 대도시 전력공급의 책임을 지방이 모두 끌어안고 있다. 생산은 먼 지방 화력·원자력 발전소에서 하고, 소비는 대도시권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진다. 먼 데 전기를 끌어오기 위한 송전탑 또한 주로 지방 몫이다.
따라서 “그냥 여기서 살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송전탑 주변 주민들이 대안으로 땅속에 전선을 묻는 지중화를 해달라는 것은 매우 정당한 요구다. 한데 지중화에서도 도·농 간 불평등이 극심하다. 대도시에는 지중화 방식을 선택하는 반면, 지방에는 비용을 이유로 송전탑 건설을 하고 있다. 이것은 문명사회의 원칙이라 할 수익자부담 원칙에도 정면으로 위배된다.
경남도민일보는 어제자 사설 ‘밀양 송전탑 강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서 “원전비리라는 돌발적 사건이 불거지면서 송전탑 건설을 시급하게 강행해야 할 이유도 사라진 셈”이라면서 “도대체 누구를 위한 송전탑 건설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고 썼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도쿄대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가 제시한 ‘희생의 시스템’ 개념이 설득력 있다. 그는 일본 사회의 본질적 구조를 원전(후쿠시마)과 미·일 안보체제(오키나와)라는 ‘희생의 시스템’에서 찾는다. 여기에는 희생시키는 자와 희생당하는 자가 있다. 이 희생은 통상 은폐돼 있거나 공동체(국가, 국민, 사회, 기업 등)를 위한 ‘소중한 희생’으로 미화된다.
그의 이론을 빌리면 우리에게도 원전,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 고압 송전탑 등 ‘희생의 시스템’이 엄존한다. 그것은 희생을 부담지우는 쪽이 부담하는 쪽에 일방적 희생을 강요함으로써 유지된다. 이때 시스템 유지에 동원되는 게 단세포적 이분법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 줄거리는 신학교에 들어간 소년 한스 기벤라트가 내면세계를 지키지 못하고 파멸한다는 것이다. ‘수레바퀴’는 세상의 몰이해, 억눌린 삶을 은유한다. 밀양의 할머니들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다. 머리에 이고 살라고 세상이 강요하는 거대한 송전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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