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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칼럼

국민적 저항, 누구 몫인가

두 주 전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적 저항’이란 말을 썼는데 용례가 독특했다. 그는 민주당 김한길 대표와 만난 이튿날 국무회의에서 “야당에서 장외투쟁을 고집하면서 민생을 외면한다면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저도 야당 대표로 활동했고 어려운 당을 일으켜세운 적도 있지만 당의 목적을 위해 국민을 희생시키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말인즉슨 민주당에 준엄한 경고를 발한 것이다.


대통령의 이 발언은 시간이 좀 지났더라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어수선한 현 정국을 파악하는 데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선 ‘국민적 저항’이란 말의 쓰임새가 생뚱맞다. 국민적 저항은 권력을 전제로 한다. 즉 권력·정권에 대한 저항이다. 야당도 또 다른 권력 아니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전날 3자회담에서 국정원 개혁 등 야당이 요구한 7개 사항을 죄다 묵살했다. 힘센 야당이라면, 또는 야당의 힘을 인정한다면 그럴 수 없었을 거다. 천막투쟁 벌이다 모처럼 대통령 만나서도 완전히 무시당하는 야당, 분명 힘없는 존재다. 그런 야당에 ‘국민적 저항’ 경고라니, 저항의 기본적 개념을 이해하고 하는 말인가. 

 

 

지난 달 16일  국회에서 열린 3자회담은 정국 현안에 대한 현격한 입장차만 재확인한 채 성과 없이 끝났다. 이튿날 박근혜 대통령은 야당에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것"이란 경고를 했다.  /정지윤 기자


 

마침 서울대 한인섭 교수가 트위터에 “야당이 국민 저항 직면한다는 말은 머리털 나고 처음 들어봤음”이라는 글을 올렸다. 그리고 “국민의 저항권은 야당이 아니라 집권자/독재자를 겨냥하게 되는 겁니다. 언제나!!”라고 덧붙였다. 명쾌하고 시원하다. 


그의 말마따나 저항권엔 발동요건이 있다. 국가권력이 국민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그럴 때 복종을 거부하고 실력행사를 통해 저항할 권리가 저항권이다. 야당은 국민 기본권을 침해할 ‘자격’이 없다. 따라서 저항 시의 저항 대상도 항상 권력이다. 김수영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소시민인 나는 설렁탕집 주인, 야경꾼, 이발장이에게 화내고 반항하는 듯하다. 하지만 궁극적인 분노가 향하는 곳은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게 만드는 권력이다. 


그럼에도 야당을 국민적 저항의 대상으로 모는 것은 억지다. 사소한 언어 개념상 혼란을 넘어 정치사회적 계층·권력관계에 대한 인식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불공정한 갑을관계를 예로 들면 저항은 약한 을이 강한 갑에게 하는 것이다. 강한 갑이 을을 상대로 저항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민주당은 갑의 횡포에 눈물 흘리는 을의 억울함을 풀어준다며 ‘을지로위원회’란 걸 만들었다. 이렇게 을과 서민, 국민 편을 표방하면서 투쟁하는 것이 야당의 제 모습이다. 그게 시원찮으면 국민한테 가차없이 두들겨 맞기도 하는데, 그럴 때 우리는 비판(批判) 또는 비난(非難)받는다고 한다. 그게 아니면 “민심으로부터 외면당한다”고 한다. 저항에 부딪힌다는 말은 안 쓴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박 대통령의 인식도 언어 개념의 혼란을 반영한다. 말은 생각의 집이다. 그는 4월 “경제민주화는 대기업, 중소기업, 소상공인, 소비자 등 모든 경제주체들이 열심히 일하면 보람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누구를 벌주거나 하는 것은 본래 경제민주화의 취지가 아니다”라고 못박았다. 


공약인 경제민주화에 대해 나름의 개념 규정을 한 것이다. 한데 이 새 개념에서는 기존 개념의 필수적 요소들이 사라졌다. 대기업의 시장지배 완화, 빈부격차·양극화 해소, 재벌 개혁, 정부의 적극적 개입이 그것이다. 그게 들어가야 경제민주화가 성립한다는 건 상식이다. 아니면 같은 언어로 다른 말을 하는 거다. 그의 경제민주화 개념은 박정희의 유신 때 구호 ‘국민총화’ 이상 생각나게 하는 게 없다. 이 공약이 이윽고 경제활성화로 둔갑한 것은 필연적이다.


필자는 박근혜의 언어에 관한 이런 분석이 이른바 ‘맥락적 이해’를 외면한 말꼬리 잡기 아닌가 자문해 본다. 그러나 이 말들은 숙고 끝에 작심하고 한 것으로 봐야 한다. 알다시피 그는 주요 현안에 대해 불리하면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며 침묵하거나 단문을 구사하는 ‘수첩공주’다. 철저한 그가 모처럼 새로운 개념 규정 같은 걸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을 리 없다. 


장경수 세종대 석좌교수는 수사학과 리더십 관계를 분석한 <위대한 침묵 51초>에 이렇게 썼다. “지도자의 한마디 한마디 말은 담론을 형성하면서 권력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또한 그들의 말은 가치관과 세계관, 그리고 성품, 즉 리더십의 색깔을 드러내는 법이다.” 지도자의 언어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설명한 것 같다.


이 ‘선거의 여왕’에겐 시련이 예고돼 있다.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 대 증세 없는 복지란 원칙 사이. 국가관, 정치철학을 형성하는 데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사람이 아버지라는 그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또 무슨 묘수를 짜낼까.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지금처럼 불통, 일방통행의 도가 지나치면 국민적 저항을 맞게 될 수 있다는 역사의 경고다.



김철웅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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