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철웅 칼럼

무서운 게 역사다

역사는 왜 배우나. 리처드 패어스(1902~1958)란 영국 역사가가 색다른 말을 했다. “25살 미만의 청소년은 역사를 공부해서는 안된다.” 요즘 역사교육 강화다 수능 필수화다 해서 가뜩이나 부담이 큰 학생들이 솔깃해할 얘기 같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일까.

“좋은 역사(good history)는 돈이나 과학처럼 유익하지는 않지만, 나쁜 역사(bad history)는 세상에서 가장 파괴적인 무기보다 더 무서운 해독을 끼친다.” 다른 게 아니라 어린 정신에 주입되는 잘못된 역사교육의 해독을 고발한 것이다. 이런 패어스를 좀 삐딱한 좌파 역사학자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는 보수주의 사가다.

 

그는 ‘나쁜 역사’에 대해 경고했다. 여기서 역사는 사건 그 자체로서의 객관적 역사가 아니라, 책으로 기술된 주관적 역사다. 따라서 ‘나쁜 역사’란 왜곡된 역사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 이로 인해 왜곡된 역사의식, 역사관이다. 이 역사왜곡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일까. 그건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나치 이데올로기의 선전도구로 이용된 역사가들이 있다. 대표적 인물이 테오도르 쉬더와 베르너 콘체다. 두 학자는 동유럽 연구를 통해 이 지역의 유대인을 인종적으로 청소해 게르만족의 정주지역으로 만들고자 했던 나치의 ‘절멸정책’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쉬더는 게르만족의 동일한 민족적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대량 주민 이주가 불가피하다면서 폴란드 지역에서 유대인을 제거할 것을 주장했다. 콘체도 1939년 “나치혁명과 총통의 명성이 벨루시아(벨라루스) 지역 외진 곳까지 스며들었으며, 특히 유대인 문제에 관한 그의 분명한 정책은 가난한 벨루시아 농민조차 느낄 정도다”라고 썼다. 유념할 것은 이들이 카를 슈미트 같은 법·정치학자가 아니라 역사학자였다는 점이다.

 

 

 

          전선의 이동으로 군 트럭에 실려 옮겨지는 일본군 위안부들. 뉴라이트 계열 교과서는 1930년대부

          터 시작한 위안부 강제동원을 1944년에야 이뤄진 것처럼 기술했다. 용납할 수 없는 역사왜곡이다.

 

역사왜곡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지금 한창 한국에서 진행되는 현대사 왜곡 논란도 다른 무엇이 아니다. ‘전쟁’이라고까지 불리는 이 역사논쟁의 복판에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가 있었다. 지난 6월 “고교생의 69%가 6·25를 북침이라고 응답한 충격적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개탄이다. 설문이 부실한 탓에 학생들이 북침을 ‘북한의 침략’으로 착각한 결과였지만, 대통령이 충격을 표시하자 일사천리로 ‘사태수습’이 진행됐다. 교육부는 역사교육 정상화 방안 연구에 착수했다. 대통령이 “대입 수능으로 들어가면 깨끗하게 끝나는 일”이라고 하자 그 말대로 됐다.

그 다음 사태가 뉴라이트 계열 학자 2명이 집필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한 일이다. 기존 교과서의 좌편향을 바로잡겠다며 심혈을 기울였다는 이 교과서가 참으로 묘하다. 아주 기초적인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한 오류투성이에다, 실증주의도 무엇도 아닌 ‘뒤죽박죽 사관’을 보이고 있다. ‘본래 그것이 어떻게 있었는가’를 역사 연구의 화두로 붙잡은 실증주의 사가 랑케가 봤다면 몹시 당혹했을 거다.

이 교과서의 크고 작은 오류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것이 종군위안부 기술의 오류다. 이 책은 “일제는 1944년 여자정신근로령을 발표하고 12세에서 40세까지의 여성들을 침략전쟁에 동원하였다. … 일부 여성들은 중국·동남아 일대·필리핀 등지로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로 희생당하였다”고 썼다. 1944년에야 위안부 강제동원이 이뤄졌다는 기술이다. 그러나 수많은 희생자들이 1930년대부터 일본군이 위안부를 강제동원했음을 증언해왔다. 일본은 1993년 고노담화를 통해 이를 사과했다. 필시 집필자는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한 것 같다.

어쩌다 이런 오류가 나왔을까. 두 가지 원인이 있을 거다. 첫째, 사실의 오류와 표절은 성실치 못함 탓이다. 둘째, 일제에 한없이 긍정적인 역사의식 때문이다. 그래서 친일인사 김성수가 항일인사로 미화되기도 하고 곳곳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의 인식이 드러나게 된다. 바로 이 부분이 정말 심각한 문제인데, 도대체 왜 그러는 건지, 그 심리의 근원이 뭔지는 속시원한 답이 안 나온다. 따라서 지속적 연구대상이다.

2002년 9월 김정일과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북·일 정상회담을 했을 때 나는 ‘일본 극우 한국 극우’란 칼럼을 썼다. 당시 일본 극우와 한국 극우의 행태가 비슷해서 이렇게 분석해 보았다. “상황에 대한 몰주체적 단순화와 이중기준, 비약으로 점철된 극우 논리의 생리가 쉽게 교정될 리 없다.” “비뚤어진 한국 극우의 특징은 분명 친일·친미의 뿌리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과거사가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11년 후 한국에서 나온 문제의 교과서를 일본 극우세력이 만든 교과서와 단순 비교하는 건 현재로선 비약일 수 있다. 그러나 학계에서 인정된 통설을 부정하고 거침없는 편향성을 드러낸 이 교과서가 그대로 학생들에게 교육되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건 다카기 마사오의 2세가 잡은 정권과의 교감 속에서 마침내 심각한 역사왜곡 교과서가 출현했으며, 더 큰 역사왜곡도 각오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김철웅 논설실장

'김철웅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전탑 밑에서  (0) 2013.10.23
국민적 저항, 누구 몫인가  (2) 2013.10.02
한여름 밤의 꿈같은 이야기  (2) 2013.08.21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0) 2013.07.31
열둘을 세면 우리 모두 침묵하자  (0) 2013.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