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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칼럼

한여름 밤의 꿈같은 이야기

이런 나라가 무슨 소용인가. 며칠 전 TV에서 본 화성 뉴스가 각별하게 느껴진 건 유치환이 시 ‘생명의 서’에서 한 것처럼 ‘독한 회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시인의 회의는 자아와 생명의 본질에 관한 것인 반면, 나는 국가의 의미에 대해 회의하고 있었다. 뉴스는 ‘마스 원’이란 네덜란드 회사가 화성 정착민을 모집하고 있는데 넉 달 사이 지원자가 120여 나라에서 10만명이 넘었다는 거다. 2023년 첫 정착민 4명을 우주선에 실어 보낸다고 한다.

성사 가능성도 미지수지만, 이 화성 여행은 편도라서 지구로 돌아올 기약은 없다. 또 그곳 삶은 엄청나게 악조건이다. 산소가 부족하고 일교차는 90도나 되며 방사능은 예측불가능하다. 중력은 지구의 38%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주복을 입고 생명유지 장치가 된 돔형 모듈에 갇혀 살아야 한다. 이런 ‘화성이민’ 모집에 반응이 뜨겁다는 게 놀랍다.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일까.

 

화성 정착민 소식을 접하며 스쳐지나간 생각은 지내기야 많이 불편하겠지만 거긴 국가란 게 없지 않으냐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지구야 멈춰라 내리고 싶다’란 식의 낙서로 자유 희구를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짜로 국가 없이 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건 좋은 일일 수도 있겠다. 오해 말기 바란다. 난 아나키스트도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의 모습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진보적 민주주의자를 자처할 순 있다. 내 질문과 회의는 “국가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다시 국가 대 개인, 안보 대 자유의 갈등으로 이어진다.

 

                    19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식 장면

 

 

어느 사회학자가 이런 명언을 남겼다. “인간은 삶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 나는 이 말에서 ‘사회’를 ‘국가’로 환치해도 좋다고 본다. “인간은 삶이 두려워 국가를 만들었다.” 따라서 국가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이 명료한 이치는 현실에서 쉽게 전복된다. 1968년 선포된 국민교육헌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국민학교’ 때 헌장을 외우도록 닦달을 당한 그때 세대는 지금도 이걸 줄줄 암송한다. 그 다음엔 ‘나라의 융성’ ‘국가건설’ ‘국민정신’ ‘반공 민주정신’ ‘영광된 통일 조국’ ‘새 역사’ 같은 삭막한 언어가 속출한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해선 독일 천재 극작가 실러의 인식이 정확하다. 그는 22살 때 쓴 <군도>에서 아버지와 형을 속이는 교활한 동생 프란츠의 독백을 통해 말한다. “무엇 때문에 그(아버지)가 나를 만들었는가. 나를 만들어 놓은 그 행위에 신성한 것이 있단 말인가. 동물의 본능을 만족시키는 금수와 같은 행위보다 그것이 무엇이 조금이라도 더 나았었다고 하겠는가….”

국민교육헌장은 국가의 이익을 개인 이익보다 절대적으로 우선시키는 사상의 세례를 듬뿍 받고 태어났다. 그것을 국가주의라고 부른다.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같은 문구는 그것 자체가 국가주의 선언이다. 시대가 바뀌어 이 국민교육헌장은 1994년 이후 기념식도 폐지되고 교과서에서 삭제됐다.

이로써 이 나라의 국가주의적 성향이 사라졌는가. 아니다. 도리어 강화되고 있다. 그것도 한층 저급하고 비열한 방향으로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을 비롯한 일련의 사건들이다. 엊그제 국정원 댓글의혹 사건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증인으로 나온 댓글녀 ‘김직원’은 댓글작업은 “북한과 종북세력의 선전·선동에 대응할 목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 사흘 전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댓글은 대북 심리전의 일환이었다며 선거법 위반 혐의 등을 전면 부인한 것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이를 두고 과연 용장 밑에 약졸 없다고 해야 하나.

 

 

                       '마스 원'의 화성 정착촌 가상도



국정원이 수장부터 하급 직원까지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원훈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 정신의 발현인가. 아니다. 금세 들통날 거짓을 일삼는 건 따로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정점은 두말 할 것 없이 국정원에 “스스로 개혁하라”며 정치적 면죄부를 준 박근혜 대통령이다.

더 나쁜 것은 이 국가주의가 색깔론을 넘어 지역주의와 결합하는 쪽으로 진화한 모습이다. 새누리당 조명철 의원이 증인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에게 “광주의 경찰이냐, 대한민국의 경찰이냐”고 물은 것은 그 압권이었다. 색깔론이든 지역감정 조장이든 물불 안 가리는 사고구조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맡겨놓은 국가란 무엇인가 다시 묻게 된다. 언제는 안 그랬냐 싶기도 하지만 지금은 유난히 국가가 국민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국가 걱정에 노심초사해야 하는 세상이다.

국가의 이름으로 자유, 인권, 민주의 가치가 간단히 유린되는 국가, 밀양 주민들의 “그냥 여기서 살게 해달라”는 애원을 묵살하는 국가, 우리를 끝없이 부자유케 하는 국가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명의 서' 화자는 회의 끝에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고 결의했는데, 나는 최소한 그런 국가가 없는 화성행 신청이라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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