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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칼럼

열둘을 세면 우리 모두 침묵하자

훌륭한 시는 더 많은 사람을 감동시킨다. 다른 말로 감정이입을 시키는 힘이 있다. 요즘 내 귓전을 맴도는 시가 있으니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침묵 속에서’다. 시는 감정이입의 폭이 소설보다 넓다. 즉 제멋대로 해석할 여지가 더 크다. 이 시가 좋은 까닭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억장이 무너질 때,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때, 전라도 사투리로 ‘중치가 막힐’ 때, 저 무수한 소란과 웅성거림에 몹시 고통스러울 때 우리는 할 말을 잃고 침묵하게 된다. 이런 내 감정이 시 ‘침묵 속에서’에 제대로 투사된다.

네루다는 노래했다. “이제 열둘을 세면/ 우리 모두 침묵하자// 잠깐 동안만 지구 위에 서서/ 어떤 언어로도 말하지 말자/ 우리 단 일 초만이라도 멈추어/ 손도 움직이지 말자// 그렇게 하면 아주 색다른 순간이 될 것이다/ 바쁜 움직임도 엔진소리도 정지한 가운데/ 갑자기 밀려온 이 이상한 상황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되리라…”

이런 구절도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삶을 어디론가 몰고 가는 것에/ 그토록 열중하지만 않는다면/ 잠시만이라도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다면/ 어쩌면 거대한 침묵이/ 이 슬픔을 사라지게 할지도 모른다…// 이제 내가 열둘을 세리니/ 그대는 침묵하라”

내가 보기에 네루다의 ‘침묵’은 역설이다. 유치환의 “소리없는 아우성”(‘깃발’)처럼. 실제론 그는 칠십 평생 시작을 멈추지 않았다. 시가 무언지도 모를 때부터, 암의 고통 속에 죽어가는 순간에도 시를 썼다. 말년에 쓴 자서전의 제목은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였다. 이 세 가지는 다른 게 아니었다. 그는 민중과 대자연, 비, 여인을 사랑했고, 이를 시로 노래했다.  

네루다는 1939년 <모두의 노래>를 쓰기 위해 아슬라네그라에 바다가 보이는 집을 마련했다. '검은 섬'이란 뜻의 아슬라네그라는 산티아고 부근 해안 마을로 섬은 아니지만 주변 바위가 검은 색을 띠고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네루다가 바다를 보며 상념에 잠겨있다.

김지하처럼 혹독한 옥고를 치른 건 아니지만 그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었다. 스페인 주재 영사로 근무하던 중 내전이 발발하자 반파시즘 활동을 벌이다 해임됐다. 상원의원 때는 대통령과 정부를 비판한 이유로 4년간 망명생활도 했다. 민중 해방을 꿈꾸며 불의와 싸운 공산주의자였다. 좌파 아옌데 정권에서 파리 주재 대사를 지내던 중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그를 두고 “어떤 언어로 보나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했다.

그런 네루다의 “침묵하자”는 제안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역시 감정이입과 공감력이 작용한 때문일 게다. 오늘의 한국은 아연(啞然)할 일 천지다. 아연은 ‘너무 놀라 입을 딱 벌리고 말을 못하는 상태’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할 말을 잃고 침묵하게 하나. 그 이유는 족히 열두개쯤 셀 수 있을 거다.

국정원의 정치·대선 개입 사실이 밝혀지자 새누리당은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를 들고 나왔다. 국정원장 남재준은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라며 국가기밀인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했다. 조직의 명예를 지키려면 까짓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는 것이나,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 같은 가치는 초개처럼 버릴 수 있다는 듯. 국회에서 김무성과 김재원이 당내 NLL 발설자 색출을 놓고 펼친 조폭적 수작을 목격할 때 우리는 차라리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싶어진다.

박근혜가 오랜 침묵 끝에 내놓은 국정원 발언도 우리를 아연케 한다. 그는 “국정원은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개혁안을 스스로 마련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중요한 무엇이 빠져 있다. 국정원이 왜 이 지경이 됐는지에 대한 판단이다. 그게 빠졌으니 조직 명예를 국익 위에 두는 국정원더러 스스로 개혁하란 말이 나온다. 국정원에 말미를 주는 모습이라기보단 유체이탈성 발언이다. NLL에 대해서도 ‘생명선’ 수호의지만 강조했을 뿐 무엇이 작금 NLL 논란의 원인이 됐는지는 모른 척했다. MB와 박근혜 정권이 어차피 초록동색이라지만 이 유체이탈 화법만큼은 박근혜가 한 수 위인 듯하다.

교활하고 사악한 말을 견디기 힘들 때는 침묵하는 게 상책이다. 그 침묵은 도피가 아니라 건강한 저항의 방식이다. 네루다의 ‘침묵’도 그런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할 말을 잃게 될 때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침묵이라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이 침묵은 높은 인화성과 폭발력을 감추고 있다. 네루다식으로 말하자면 “이제 스물넷을 세면” 침묵은 임계점에 이르러 폭발할지 모른다. 폭풍 전야의 고요란 말도 있다.

새누리당 사무총장 홍문종이 “박 대통령 임기가 끝나고도 우리가 최소 10년은 더 집권해야 대한민국이 반석에 올라간다”고 했다. “NLL 포기 논란을 비롯해 많이 보지 않았느냐. 민주당은 믿을 수 없으며 정권을 맡길 수 없다”며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런 기고만장 앞에 어찌 한번 더 침묵하지 않을 수 있으랴.

마침 시인 안도현이 “박근혜가 대통령인 나라에서는 시를 단 한 편도 쓰지 않겠다”며 절필 선언을 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는 “시를 쓰는 것도 현실참여일 수 있지만 안 쓰는 행위도 현실에 참여하는 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역시 천생 시인이다. 어떤 시인에게는 시대의 감수성을 앓는 것이 시대와 불화하는 것이 된다. 삶이 시였고 시가 삶이었던 네루다가 그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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