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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칼럼

봄날은 가고, 음악이 위로다

‘봄날은 간다’는 불후의 명곡이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를 들을 때 가장 한국적인 연분홍의 진달래꽃이 저절로 떠오른다. ‘겨울나무’란 동요가 있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로 시작하는 가사가 동요답지 않게 심오하다. 특히 2절이 그렇다. “평생을 살아봐도 늘 한자리/ 넓은 세상 얘기도 바람께 듣고/ 꽃피던 봄 여름 생각하면서/ 나무는 휘파람만 불고 있구나.” 이 정도면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말라’고 한 <장자>가 생각난다.

노래로 말문을 연 건 음악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우리는 때로 위로받고 싶다. ‘삐에로’처럼 웃어야 하는 900만 감정노동자들만 그런 게 아니다. 기자도 광의의 감정노동자다. 싫은 뉴스라도 듣고 챙겨야 한다. 뉴스의 감옥에 갇혀 ‘쇼는 계속돼야 한다’를 강요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가끔 든다.

세상은 갈수록 불통으로 간다. 이건 소통기제가 광속도로 발달한 이 시대의 역설만도 아니다. 1960년대 사이먼과 가펑클은 ‘침묵의 소리(The Sound Of Silence)’에서 노래한다. “People talking without speaking/ People hearing without listening(사람들은 말하지 않으며 말하고/ 듣지 않으며 듣는 체하네).”

음악과의 소통은 이런 불통의 세상에서 한 줄기 위안이다. 첼로의 거장 파블로 카잘스는 “음악이란 자기수양”이라고 했다. 긴 세월과 풍상을 겪으며 고전이 된 클래식 음악, 그것이 주는 사유와 성찰력에 대해 말한 것 같다. 음악에는 ‘힐링’의 힘이 있다. 인생의 희로애락, 우수사려, 애별리고(愛別離苦),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음악은 사람에 따라 제각각 다르게 들린다. 음악은 소리가 재료인 극단적 시간예술이고, 사람마다 정서와 감수성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문 음악인이 아닌 ‘딜레탕트’라면 자기식으로 공감하고 평가하는 것으로 족하다.

까닭없이 삶이 쓸쓸해질 때, 슈베르트가 위안이 돼 준다. 피아노곡인 그의 환상곡 C장조 ‘방랑자’를 듣는다. 쇼팽의 음악이 화사한 우수라면 슈베르트는 그냥 외롭고 슬프다. 짧은 삶을 보헤미안처럼, 겨울나그네처럼 살다 가서일까. 그는 가곡 ‘방랑하는 나그네’도 작곡했는데, “그대가 없는 곳, 그곳에 행복이 있다”고 사랑에 찢어지는 마음을 노래한다.

 

 

                         알프레드 브렌델

 


‘방랑자’는 알프레드 브렌델(1931~)의 연주로 들어볼 일이다. 도수 높은 뿔테안경을 쓴 그는 도무지 낭만적 감정에 휩쓸릴 것 같지 않은 외모의 진지한 피아니스트다. 그런 그가 의외의 말을 했다고 한다. “방랑은 낭만의 조건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 조건을 따르고… 어떤 이는 탈출구가 없는 상황에 내몰려 고통받는다.” 이런 기막힌 말을 던진 그가 독일 TV에서 녹음한 ‘방랑자’ 연주를 유튜브에서 봤다. 3악장 피날레에서 보여준, 온몸을 내던지는 격렬한 몸짓은 파격이었다. 그때 그의 가슴속에선 낭만과 방랑의 기쁨, 고통이 교차하지 않았을까.

차이코프스키는 친구인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죽음을 애도해 피아노 3중주 a단조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을 작곡했다. 피아노 부분이 특히 화려하지만 내게는 끝맺음이 강렬한 느낌을 준다. 1악장의 제1주제 ‘미레파미레도시라~’가 3악장 코다에서 다시 출현하며 이어 긴 연주가 끝나는 순간 4개 음표로 된 부분동기 ‘미레파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첼로가 ‘미레파미’를 2번 반복하고 피아노 반주가 ‘라미라’를 몇 차례 두드리며 곡은 희미하게 꺼져간다. 작곡자는 이 부분동기를 곡 시작과 마지막에 배치함으로써 “친구의 삶은 (예술을 통해) 계속된다”는 암시를 한 듯하다.

그 영향을 받았는지 1893년 스무 살이던 라흐마니노프는 존경하는 차이코프스키가 타계하자 애도하는 ‘비가풍의 3중주곡 2번 d단조’를 작곡했다. 이 곡에도 ‘어느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이라는 부제가 붙었고, 마지막 선율을 곡 시작과 같은 선율로 마무리하는 기교를 썼다.

 

 

                                              발렌티나 리시차

 

 

발렌티나 리시차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 1악장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2번 c단조는 강렬한 정열과 섬세한 비애가 전곡에 흘러넘쳐 한 음도 버릴 게 없는 곡이다. 1악장 6분쯤 펼쳐지는 클라이맥스에서는 급류를 거슬러 힘차게 뛰어오르는 연어가 상상될 정도로 피아노가 오케스트라와 숨가쁜 경쟁을 벌인다. 많은 연주 가운데 최근엔 우크라이나 여성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가 발군이다. 누군가 빌헬름 박하우스와 마르타 아르헤리치를 합친 것 같다고 평했을 만큼 화려한 기교와 힘, 집중력으로 폭풍처럼 몰아치는 연주를 한다.


음악과 가까워질 수 있는 통로는 옛날보다 훨씬 풍족해졌음에도 실제 우리 삶은 반대로 가는 것 같다. 속도를 최고 가치로 여기는 시대에 음악과 더불어 느리게 살기를 바라는 건 사치거나 시대착오인 것인가. 가까운 후배가 얼마 전 클래식 이야기를 펴냈는데 제목이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다. 그 뜻은 “음 하나하나를 충분히 눌러 무겁고 느리게 연주하라”는 음악 기호다. 거기엔 삶을 성찰·관조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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