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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칼럼

인간존중을 위한 ‘보도지침’

 

팔레스타인 시인 마무드 다르위시(1941~2008)에게 희망은 불치병이었다. 2002년 3월 이스라엘의 공격이 벌어지는 팔레스타인에 파견된 국제작가회의(IPW) 대표단 앞에서 그는 감동적 환영사를 한다. “우리에겐 희망이라는 치유할 수 없는 병이 있습니다. 해방과 독립에의 희망 말입니다.” 그는 희망들을 열거했다. 자식들이 안전하게 등교하는 희망, 임산부가 군 검문소 앞에서 죽은 아기를 낳는 게 아니라 병원에서 산 아이를 낳는 희망, 시인들이 피가 아니라 장미에서 빨간색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될 날에 대한 희망….

시인이 희망을 불치병으로 은유한 사연을 소개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절망이란 불치병을 앓고 있는 우리 현실을 돌아보기 위함이다. 그 병이 깊어 소중한 삶을 스스로 포기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한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8년째 1위다. 2010년 10만명당 자살자는 33.5명으로 OECD 평균 12.8명의 2.6배다. 하루 평균 42.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암, 뇌혈관·심장질환에 이어 사망원인 4위다. 10대 사망원인 가운데 질병이 아닌 것은 자살과 교통사고(9위)가 있다. 20년 전 한국의 교통사고율은 세계 최고로, 사망자가 연간 1만5000명을 넘었다. 이 숫자는 2011년 5000명대로 줄었다. 2003년을 기점으로 자살자와 교통사고 사망자 숫자가 역전됐다. 가장 큰 공은 안전벨트 생활화였다. 여기엔 언론의 역할도 컸다고 한다.

 

 

괴테가 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유럽에서 모방자살 현상을 일으켰다. 미국 사회학자 데이비드 필립스는 1974년 이를 '베르테르 효과'라고 이름붙였는데, 유명인의 자살에 관한 언론보도가 나간 뒤 자살률이 급증한다는 사실이 바탕이 됐다. 사진은 1774년 발간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초판./위키피디아

 

 

왜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아졌나. 가장 손쉬운 답이 “사는 게 힘들어서” 같지만 이건 설명이 될 수 없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의 조건이 우리보다 훨씬 열악하고 고단할 것이다. 독립국가의 지위도 못 얻어 세계보건기구(WHO) 자살률 통계에도 안 나온다. 하지만 과문한 탓인지 그곳에 자살이 많다는 말은 못 들었다. 정상적 국가간 비교를 해봐도 국민소득이나 공정분배를 보여주는 지니계수, 삶의 만족도 등이 자살률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필시 여기에는 정치 경제는 물론 종교 문화적 요소, 지리 역사적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리라.

단선적 접근을 삼가야 함에도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언론보도다. 언론의 자살보도가 자살 예방 문제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여고생 ㅎ양이 겪은 일이다. 그는 ‘그룹홈’이란 시설에 있을 때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다. 그러자 또래 3명이 연쇄적으로 같은 방법으로 ‘행동’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또 “자살 뉴스가 나오면 그런가 보다 하다가도 기분이 울적해졌을 때 그 뉴스가 기억나고 방법까지 따라하고 싶어진다”고 말했다.

ㅎ양은 자살 충동의 확산이라는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다. 자살이 전염성이 있다는 건 옛날 베르테르 효과 이래 증명된 사실이다. 국내에서도 유명 연예인의 자살은 예외없이 모방자살을 촉발한다. 단순화하면 이런 과정이다. 자살 사건이 발생한다. 언론은 여느 사건처럼 일상적으로 기사가치를 매겨 보도한다. 바로 이 일상적 보도가 문제다. 그런 보도가 자살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것이란 생각, 나아가 자살의 일상화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자살이란 사회적 전염병의 주요 매개체로 언론매체를 지목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물론 전적으로 언론에 그 책임을 묻는 것은 지나치다. 팔레스타인 얘기를 했지만 우리 같은 입시지옥이나 따돌림, 학교폭력은 없을 것이다. 고생 끝에 대학에 들어가서도 스펙쌓기와 취업 전쟁에 이렇게 시달려야 하는 곳이 또 있을까. 언론의 본령인 비판이란 관점에서도 그렇다. 얼마전 경북 경산에서 일어난 고교생 투신자살의 경우 학교폭력 피해를 밝힌 유서를 남겼다. 그렇다면 대대적 보도로 사회문제화해 고질적인 학교폭력을 근절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그럼에도 언론이 이 안타까운 죽음들의 보도에서 지켜야 할 규범은 분명히 있다. 학교폭력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비판하되 그 와중에 발생한 자살에 대해서는 매우 섬세한 접근이 요구된다. 자살문제만큼은 언론이 특별관리할 필요가 있다. 이유는 더없이 분명하다. 한 사람의 생명이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살사건은 사실보도 원칙에서 극히 예외적인 것이란 인식도 필요하다.

다행히 우리에겐 좋은 ‘보도 지침’이 있다. 2004년 자살예방협회와 기자협회, 보건복지부가 함께 만든 자살보도 권고기준이다. 자살보도를 자제할 것, 자살 방법을 자세히 묘사하지 말 것, 자살 동기를 단정적으로 보도하지 말 것, 자살을 미화하거나 고통 해결 수단인 것처럼 묘사하지 말 것, 속보 특종경쟁을 하지 말 것, 대안을 제시하고 자살을 극복한 사례를 조명하며 남겨진 유가족들의 고통을 알릴 것 등의 내용이다. 문제는 이 기준이 거의 잊혀진 듯하다는 것이다. 언론을 통제한 5공 때 보도지침에 대한 불쾌한 기억과는 달리 이 지침은 생명존중 정신의 소산이다. 기자도 데스크도 한번씩 더 생각하고 기사를 넘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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