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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칼럼

증세 없는 복지국가?

지난 2일 서울에 사는 ㅊ씨(49·여)가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편(51)과 두 아들을 남겨둔 채였다. 형제는 각각 두 살 무렵부터 뮤코다당증이란 희귀난치성 질환을 앓고 있었다. 이 병은 몸에 쌓이는 이물질 분해 효소가 부족해 신체 기관들이 성장을 멈추고 기능을 잃게 만든다. 지능도 안 자라 형제는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한다. 그저 기저귀를 차고 누워있을 뿐이다. 유서는 남기지 않았으나 경찰은 고인이 중증장애 형제를 돌보느라 너무나 힘들어 하다 자결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사실은 지난 6일 한겨레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기사 제목이 읽는 이의 가슴을 친다. “희귀병 두 아들 손발이 돼 20년, 엄마는 버티다 못해…”

지난 7일 조간신문들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내놓은 보도자료를 주요 뉴스로 다뤘다. 내용은 4대 중증질환의 진료비 전액 국가부담 공약 범위에 “선택진료비(특진료), 상급병실료, 간병비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4대 중증질환은 암·뇌혈관·심혈관·희귀난치성 질환을 말하는데, 앞서 형제가 앓고 있는 뮤코다당증이 희귀난치성 질환에 속한다. 보건복지부는 107개의 희귀난치성 질환 목록을 정해놓고 있다. 이 가운데 코드번호 E76으로 분류된 ‘글라이코스아미노글라이칸 대사 장애’가 속칭 뮤코다당증이다.
 

안타깝게도 ㅊ씨가 끝내 버티지 못한 데는 경제적인 요인도 많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엄마는 24시간 아이들을 보살펴야 했고, 아버지는 오토바이 퀵서비스를 하다 2년 전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그만뒀다. 월 76만원 정도의 기초생활수급비가 네 식구의 생활비였다. 국가와 복지단체가 비싼 치료약과 특수영양식 비용을 일부 지원하고는 있다지만 그 정도로는 절대 부족하다. 홍혜숙 뮤코다당증환우회 회장은 “이런 가정이 깨지지 않도록 사회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난 8일 청주의 재활병원에 입원해 있는 안정숙씨(왼쪽)의 손을 남편 김재식씨가 주물러 주고 있다. 

        이들은 박 후보의 중증질환 진료비 국가부담 공약 철회에 허탈해 하고 있다. /박민규 기자



그 점에서 희귀난치성 질환 등 4대 중증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초 박근혜 대선 후보의 공약은 한줄기 빛과 같은 것이었다. 박 후보는 지난해 12월16일 문재인 후보와의 TV토론에서도 “4대 중증질환은 국가가 100%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문 후보가 무리가 아니냐고 확인해도 그렇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당선인’이 된 박 후보는 이내 말을 바꿨다. 인수위 보도자료에서 밝힌 대로다.

어제 경향신문은 다발성경화증이란 희귀난치성 질환을 앓고 있는 안정숙씨(45) 얘기를 실었다. 안씨 부부는 “3대 비급여 부문이 지원되지 않는다면 우리 같은 중증질환 환자들에게는 달라지는 게 아무것도 없다”며 절망했다고 한다. 억장이 무너진 거다. 안씨는 희귀난치병 환자로 등록돼 진료비의 95%를 건강보험에서 지원받는다. 그러나 비급여 항목인 선택진료비, 상급병실료가 결코 임의로 할 수 있는 ‘선택’ 사항이 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박 당선인이 이렇게 말을 바꾼 이유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돈 때문이다. 당선되고 나서 다시 살펴보니 공약이행이 그렇게 간단치 않은 것이다. 그는 중대한 딜레마에 빠진 것 같다. 약속을 지키는 것과 재원 마련 사이에서 진퇴양난에 처한 모습이다.

대선 공약에 관한 한 박 당선인이 수정론에 부정적인 것은 맞다. 지난달 각 지역 선거대책위원장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대선 때 공약한 것을 지금 와서 된다, 안된다고 얘기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공약은 국민과의 약속이니까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래야 정부에 대한 신뢰가 쌓인다”고 강조했다고도 한다. 공약에 대해 예의 ‘토’를 달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복지공약 재원 마련책으로 증세가 아닌 제3의 길을 택했다. 비과세 축소, 지하경제 양성화, 건설·국방 등 예산 절감 같은 것이다. 그러면서 “복지를 위한 증세는 없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이것은 일견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증세가 몹시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옛날 공자가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 가혹한 정치는 세금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 조선 후기엔 백골징포, 황구첨정 같은 악명 높은 세정문란이 있었다. 이런 것들이 세금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정치는 세금과 무관해야 한다는 생각을 확산시켰다.

그러나 이 시대에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증세라는 해법을 우회해 복지국가를 위한 다른 방안을 찾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단언하건대 공약 이행을 위해 필요한 연간 27조원 이상의 추가 재원을 조달하는 방안은 증세 말고는 없다. 그걸 피하는 묘수란 건 결국은 꼼수로 판명날 것이다. ‘증세 없는 복지국가’란 ‘둥근 사각형’처럼 형용모순이다. 유럽 복지국가들의 경험이 그렇다. 박 당선인은 “아버지의 꿈은 복지국가의 건설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 이행방안은 분명하다. 그것은 증세라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결단이다. 그가 ‘아버지의 꿈’을 이루기 위해 그것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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