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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칼럼

꼭 내일이 아니라도 좋다

지난해 말 황석영의 소설 <객지>(1971년)를 다시 읽었다. 갑자기 떠오른 이 소설 마지막 문장 “꼭 내일이 아니라도 좋다” 때문이었다. 대선 직후부터 이 말이 좀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이듬해에 발표된 이 소설을 옛날보다 꼼꼼히 읽었다.

<객지>는 작가의 28세 때 작품임에도 사실적이고 긴박한 문체로 노동자들의 투쟁을 묘파해 한국 노동문학의 고전이 됐다. 헤밍웨이도 1926년 27세에 첫 장편 <해는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로 일약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소설은 1차 세계대전 후 파리 등을 배경으로 저마다 전쟁의 상처를 안고 취해 흐느적거리는 ‘잃어버린 세대’의 허무감을 잘 그렸다.

<객지>의 줄거리는 이렇다. 1960년대 운지 바닷가 간척 공사장. 젊은 주인공 동혁과 대위란 별명의 사내 등은 너무 낮은 임금과 비인간적 처우에 분노한다. 공사장은 온통 착취구조다. 십장·감독들은 전표장사나 돈놀이를 하고 함바(노동자 합숙소, 현장식당)는 함바대로 돈을 빼먹는다. 회사는 깡패들로 감독조를 만들어 노동자들의 불만을 억누른다. 동혁은 국회 답사단이 오는 때에 맞춰 쟁의를 벌이려 한다. 그러나 우발적 사건 때문에 예정보다 빨리 노동자들이 행동에 나선다. 회사는 속임수로 이들을 동요하게 만들고 결국 쟁의는 실패로 돌아간다.

서두에 말한 소설 마지막 문장은 이런 이야기 끝에 나온다. 노동자들은 농성하던 독산에서 모두 내려가버리고 동혁만 남는다. 여기서 그는 “꼭 내일이 아니라도 좋다”고 혼자서 다짐한다. 

잇따라 자살을 선택해 죽은 노동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지난해 12월 26일 서울 대한문 앞에서 '더이상 죽이지 마라!' 추모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노동과세계

이 문장이 내게 와닿은 이유는 아마 감정이입 때문이리라. 스토리로 볼 때 이 말은 “실패했다고 투쟁이 끝나는 게 아니며 계속될 것”이란 희망의 표현이다. 동혁이 현장소장과 담판하며 “우리가 못 받으면, 뒤에 오는 사람 중 누군가 개선된 노동조건의 혜택을 받게 될 거요”라고 말한 것과 비슷하다. 인문학적 상상력을 조금 발휘하면 동혁이 한 다짐의 의미를 이렇게 확장할 수 있다. “조급증을 버리고 뚜벅뚜벅 전진하자. 진보가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 정권교체, 새로운 정치란 게 절대 쉬운 게 아니다.”

문학의 미덕이 위로와 공감이라면 <객지>는 대선 때문에 맥 빠지고 절망한 사람들에게 그럴 수 있다. 동시에 우리 노동현실을 돌아보게도 한다. 소설 속 간척 공사장은 40여년 전의 가상 현실이다. 노동자들의 인권이나 노동조건 등이 지금보다 몹시 나빴으리라 짐작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도리어 산업화 초기의 <객지> 시대에 비추어 2013년의 노동현실은 구조적으로, 제도적으로 훨씬 더 악화된 측면들이 있다.

가령 2010년 말 대형 함바집 비리 사건이 터졌을 때 대형 건설사 임원과 경찰 수뇌부, 정·관계 고위인사 등이 줄줄이 연루돼 사법처리됐다. 이들이 운영권을 매매하며 챙긴 거액은 고스란히 노동자의 식대에서 나왔다. 또 오늘날 용역경비업체들이 노사분규에 개입해 조직적으로 살벌한 노조 파괴행위를 일삼아온 것을 보라. 그 옛날 깡패들의 감독조 시절이 되레 애교스럽고 낭만적 구석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훨씬 무섭고 조직적인 노동착취는 따로 있다. 바로 노동착취를 극대화하면서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은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부각된 만큼 <객지> 시대엔 그런 개념이 없었다. 간척 노동자들은 공장 노동자와 달리 임시 고용인으로 취급됐고, 자기들끼리는 자조적으로 부랑 노무자, 날품 인부란 말을 썼다.

당시 자료가 없으니 비교가 어렵지만 현재의 비정규직 비율이 훨씬 높고 또 심한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추측은 가능하다. 우리 비정규직은 전체 노동자의 절반에 가깝고, 급여는 정규직의 절반도 안된다. 이 시대의 노동자들은 때로 비정규직과 정리해고에 맞서 죽음으로 항거하기까지 한다.

그 처절함과 절박함에서 40여년 전 운지 간척 공사장은 이 시대의 영도조선소를 따라갈 수 없다. 부산 한진중공업 복직 노동자 최강서씨(35)는 대선 이틀 후인 지난달 21일 목을 맸다. 그는 회사가 노조를 상대로 낸 158억원의 손배소를 철회하라는 유서를 남겼다. 지난 5월 그는 트위터에 “더 이상 열사 없는 세상을 만듭시다. 꼭 살아서 함께합시다”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더는 죽는 노동자가 없어야 한다더니 끝내 한진중공업의 네 번째 열사가 되었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의 절규와 수십일째 계속되는 고공농성들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잇단 죽음은 대선 결과에 대한 절망감 탓이 크다. 노동탄압 현실이 안 바뀔 거란 절망감이다. 당연히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무슨 이념도 법치도 그걸 막을 순 없다.

그러나 설사 그들의 침묵이 계속되더라도 극단적 선택을 생각해서는 절대 안된다. 황석영은 훗날 나온 재판에서 <객지>의 결말을 동혁이 자결하는 것으로 고쳤다고 한다. 무슨 이유에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개작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또 동혁이 혼자 “꼭 내일이 아니라도 좋다”고 다짐하고 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문학 속 얘기다. 현실에서 노동의 힘은 연대에서 나오는 것을 결코 잊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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