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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칼럼

비판의 타이밍

엊그제 비가 오는 출근길 버스 정류장에서 나는 작은 공분(公憤)을 느꼈다. 정류장 지붕 몇 군데가 새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벌써 여러 달째 이 모양이다. 엄연한 공공시설을 날림 공사 해놓고 방치하고 있다니…. 은근히 울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내 분노는 그것으로 끝이다. 나는 김수영의 시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화자처럼 ‘(야경비) 20원을 받으러 세번째 네번째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 어쩔 수 없는 소시민이다.

지난주 4대강 공사가 부실투성이란 감사원의 발표가 있었다. 4년간 22조2000억원을 투입한 4대강 사업이 전반적으로 부실이라는 것이다. 보의 내구성, 수문의 안전성 등 주요 시설물부터 수질관리 기준, 수질 예측, 수질관리 방법 등 수질관리 분야, 준설량 검토와 둔치 관리계획 등 유지관리 분야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그랬다. 이명박 정부가 대단한 거짓 선전을 해온 것이다.

규모에서는 큰 차이가 있지만 버스 정류장과 4대강 공사의 문제는 부실이란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다. 공적 분노, 공분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버스 정류장 부실이야 개인이 삭이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로되 4대강 사업은 그렇지 않다. 공분의 이유와 크기가 다른 것이다. 쓴 돈과 파장이 천양지차다. 숱한 반대에 귀를 막고 국책사업이란 이름으로 마구잡이로 전국의 강을 파헤쳤다. 마땅히 그 정치적·사법적 책임을 추궁해 밝혀야 할 문제란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현재 준공된지 4개월 된 낙동강 구미보 콘크리트 본체에서 물이 줄줄 새고 있어 부실시공 논란과 함께 정밀 안전진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중앙 이음새 부근에서 물이 새고 있다. (사진=구미 YMCA제공)

 


특이한 일은 이 공분과 공감대를 촉발시킨 것이 조선일보라는 사실이다. 조선일보는 17일 감사원의 공식 발표가 있기 전인 지난 9일 “감사원의 4대강 사업 감사 결과, 문제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단독보도한 바 있다. 1면 톱으로 나간 이 기사는 수질 개선과 수량 확보가 문제고, 보 균열과 하단 세굴현상이 확인됐다는 것 등을 다른 언론에 한 발 앞서 터뜨렸다. 과감하게 공사 부실 문제의 공론화에 앞장선 것이다.

 

 

지난 17일 낙동강 상주보에서 고정보와 연결된 둑 콘크리트 블록에 균열이 발견돼 시공사가 보수공사를 벌이고 있다.


 

이걸 특이하다고 보는 이유는 조선일보가 좀체로 할 것 같지 않은 일을 했기 때문이다. 4대강 사업에 대한 조선일보의 보도는 이명박 정부 내내 대체로 우호적이었다. 환경단체 생태지평의 명호 사무처장은 “다른 언론이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 조선일보는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말했다. 장마에 콘크리트 보 시설이 파여 나가고, 동식물 멸종위기 문제가 제기되고, 4대강 사업 속도전 때문에 노동자 2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을 때도 그랬다.

엊그제 민언련에 따르면 지난해 9월 공정거래위가 4대강 담합 조사 발표를 미루고, 처리 시점을 청와대와 사전 협의한 정황이 포착됐을 때도 조선은 중앙·동아일보와 함께 이를 일절 보도하지 않았다. 4대강 사업 지역에서 봄철 가뭄이 심각하게 나타나거나, 홍수 피해가 크게 발생하거나, 녹조 현상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될 때도 조중동은 4대강 사업과의 연관 가능성은 끝내 외면했다.

언론의 본령은 비판이다. 언론은 정당한 공분의 생산·전달자이기도 하다. 이 바람에 가장 많이 공분의 대상이 된 신문도 조선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이 4대강 사업 동조자에서 이제서야 강한 비판자로 돌아선 데는 어떤 속셈이 깔려 있는지 궁금해진다. 가장 손쉬운 해석은 조선이 정권 말기에 대통령이 바뀌자 ‘말을 갈아탔다’는 것이다. 그 판단에 있어 최우선 고려 사항은 자신의 이익이다. 그것은 4대강을 찬양할 때도, 비판할 때도 똑같다. 중요한 건 4대강 사업의 진실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누가 자기 이익과 부를 지켜줄 것인가다. ‘언론의 정도’는 세상 모르는 소리다. 간이라도 내줄 듯 굴다가도 죽은 권력은 가차없이 물어뜯는 언론을 하이에나에 비유하는 건 이런 생리 탓이다. 그러나 이건 너무 단순한 해석 아닌가 한다. 유력 신문의 보도 변화엔 그런 가벼움을 넘어선 웅숭깊은 사연이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비판을 업으로 하는 기자에겐 무엇을 어떻게 비판하느냐에 못지않게 중요한 게 있다. 그것은 비판의 때, 타이밍이다. 조선이 늦게나마 4대강 부실 공사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기여한 건 평가할 일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때를 놓친 기사는 생명력을 잃는다. 방송이 그렇지만 일간지도 하루 지난 것은 구문(舊聞)이 돼버리기 십상이다. 특히 무엇을 비판하는 기사가 그렇다. 기사는 생생한 사실들로 구성된 생명체와 비슷하다. 또는 즉시 먹지 않으면 녹아버리는 아이스크림과 같다. 치열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비판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비판엔 용기가 따른다. 비판에 박수를 보내는 건 불이익이 예견됨에도 용기를 낼 때다. 김지하는 엄혹한 유신시대에 시 ‘타는 목마름으로’로 민주주의가 압살당하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노래했다.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와닿는 것도 일제 치하의 민족현실을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론도 시대현실과 정직하게 대면하려면 타이밍의 중요성을 소홀히 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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