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새누리당 대구시당이 대통령 사진을 ‘존영(尊影)’이라는 옛날식 높임말로 불렀다는 문제로 세상이 시끄러웠다. 권위주의 시대의 잔상이니, 시대착오적이라느니 해가며 말이다. 요며칠 살펴보니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비판 일색인데, 정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분명히 이런 일방적 비판이 부당하다고 여기는 침묵하는 다수가 있다고 믿는 바, 이들을 대변하기 위해 분노의 필을 든다.


 첫째, 우선 대통령 존영 반납을 요구한 대구시당부터 살펴보자. 당 관계자는 “대통령 사진은 엄연히 정당 자산이며, 탈당하면 해당 자산을 정당에 반납하게 되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아, 이 공사 구분의 엄정함이여. 비록 공무원은 아니지만 집권 공당의 당직자란 점에서 그의 판단은 공무를 다루는 모든 사람이 귀감으로 삼을 일이지 결코 조롱거리가 될 수 없다.


 대구시당은 덤으로 웃음거리까지 선사했다. 경제도 어렵고 끔찍한 사건들도 반발하고 참으로 웃을 일 찾기 힘든 게 요즘 세상살이다. 한데 이들은 모처럼 즐거움을 안겨줬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관훈클럽에서 그러지 않았나. “그동안 머리 아픈 일이 많이 있었는데 아주 좋은 코미디를 보는 것 같은 기분 들었다”고.



유승민 '새누리당을 떠납니다'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이 지난 23일 오후 대구광역시 동구 용계동 자신의 선거사무소에서 새누리당 탈당 및 20대 총선 대구동구을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기 위해 도착하며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기자회견장으로 사용된 회의실앞에는 박근혜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다.
ⓒ 권우성


 


 둘째, 본격적으로 존안이란 용어를 사용한 문제로 들어가 보자. 나는 이런 격조있는 말을 쓴 것이야말로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안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실천이 아닐 수 없다고 본다. 또 우리에겐 삼강오륜(三綱五倫)이란 소중한 덕목이 있다.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이라 하여 임금과 신하가 지켜야 할 도리가 있음을 가르쳤고, 오륜 역시 군신유의(君臣有義·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중시했다.


 그러나 근대화 과정에서 이런 가르침은 켸켸묵은 것으로 치부됐다. 가령 철학자 탁석산은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란 책에서 오늘의 한국이 역동적인 이유는 조선의 전통과 단절한 데 있다며 “철학, 종교, 정치 면에서 조선과의 단절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게 한 것”이라고 썼다. 하지만 그건 부분적 진실일 뿐이다. 삼강오륜은 봉건시대의 덕목에 불과한 게 절대 아니며 오늘날에도 현대적이고 창조적인 해석을 통해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 군신유의의 경우 임금이 아니라 대통령을 향한 존숭으로 해석하면 된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한데도 ‘존영’ 표현을 계기로 저 종북좌파들이 언죽번죽 준동하는 꼴을 보라. 진 모라는 교수는 “존영이라… 어휴, 남조선이나 북조선이나… 조선은 하나다”라고 비아냥대는 글을 올렸다. 조 모 교수는 “존영 대신 어진(御眞)이라고 하지 그랬느냐? 도를 넘는 충성경쟁, 참으로 역겹다”고 비판했다. 종북좌파들은 틈만 나면 남과 북의 동질성을 과장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번에도 남의 ‘존영’ 사용을 북의 ‘최고 존엄’과 비교하는 망동을 일삼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 대목에서 남과 북이 겹쳐보이기는 한다.

 

   개인적으로 이는 유구한 왕조경험에서 형성된 우리 민족의 유전자 탓이 아닌가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우리처럼 긴 왕조의 경험은 흔치 않다. 고려 34대 475년, 조선 27대 519년 등 2개 왕조만 해도 도합 천년이다. 그래선지 현대의 대통령을 과거의 왕이나 나랏님과 동일시하는 사고방식도 낯설지 않다. 왜 얼마전 새누리당내 공천파동도 ‘옥새투쟁’이라고들 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 역사적 경험을 긍정적 에너지로 승화시켜야 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의 전통적 윤리를 복원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아름다운 유교적 전통을 내면화해야 한다. 종북좌파들의 발호 탓에 대통령을 조롱하는 풍토가 근래에 극에 달했다. 이명박 대통령 때 그를 쥐에 빗대 모욕한 사건이 지금도 생생하다.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이 시기에 우리가 택할 길은 권위에 대한 저항보다는 순종이다. 반대보다는 지지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즐겨 주창한 바 총화단결만 하면 우리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막말로 탈권위주의나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나.


 이참에 본인은 요즘 사용이 뜸해진 예스럽고 격조있는 말들도 부활시킬 것을 주장하는 바이다. 그것은 ‘(대통령의) 진노’나 ‘(금일봉) 하사’를 비롯해 ‘각하’ ‘가신’ ‘읍소’ ‘진언’ 같은 언어다.

Posted by 김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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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과거 ‘친일, 반민족적’ 문제 발언들이 공개된 뒤 비판여론이 비등하고 있지만 옹호론도 만만치 않다. 옹호론은 크게 두 갈래다. 하나는 그 발언들을 맥락적으로 이해하면 큰 문제 될 게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 장로로서 교회란 특별한 공간에서 한 발언임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KBS가 자극적으로 딱 특정 부분만 편집해서 보여줬으니까 그렇지, 뭐 그리 흥분할 일도 아닌 건가.


 맥락적 이해란 말이나 문장은 어느 부분만 잘라내지 말고 전후 문맥을 살펴야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윤상현 새누리당 사무총장이 그를 두둔한다며 이런 말을 했다. “정치인이 마음껏 말하듯 언론인들도 자유롭게 말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예전에 한 글과 말 몇 마디를 갖고 그의 삶과 생각을 규정하려 한다면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다.”


 말은 잘 했다. 정치판에서 상대 발언의 전후 문맥은 거두절미한 채 특정 부분만 부각시켜 공세를 펴는 일이 얼마나 많나. 그렇게 말꼬리 잡기를 함으로써 본래 취지는 왜곡된다. 이 수법은 소모적 진흙탕 싸움을 도발하는데 그만이다. 앞뒤 맥락을 외면한 채 ‘고무 찬양’ 혐의 따위를 뒤집어씌우는 종북몰이가 대표적 사례다. 지금도 정부 반대를 종북, 빨갱이로 모는 일이 툭하면 벌어지고 있다.


 문 후보자의 경우 맥락적 이해를 하자는 말은 그의 강연을 포함해 평소 생각을 차분하게 이성·논리적으로 살펴보자는 뜻일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새누리당은 지난 13일 주요 당직자 회의에서 “일본 식민 지배는 하나님 뜻”이라는 등 문 후보자 발언이 담긴 1시간 분량의 동영상을 시청했다. 그 후 상당수 당직자들이 긍정적인 태도로 돌아섰다고 한다. 한 의원은 “문 후보자는 나라를 사랑하는 분”이라고, 다른 의원은 “강의내용이 본받을 만하다”라고까지 했다. 그들의 변화는 맥락적 이해를 한 결과일까.

 

 

문창극 국무총리 지명자가 13일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으로 출근하면서 기자들 질문에 답하고 있다. 문 지명자는 여당 초선의원들의 사퇴요구에 대한 입장을 묻자 “앞으로의 문제이기 때문에 다음에 말씀 드리겠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윤 사무총장은 “우리 민족이 게으르다는 것은 문 후보자 얘기가 아니라 윤치호 선생의 얘기”라며 “조선의 지식인들이 게으르다는 것이 왜곡돼서 편집됐다”고 주장했다. 이날 동영상 시청은 당 안팎에서 일고 있는 ‘문창극 자진사퇴’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기획된 것인 만큼, 보도가 왜곡 짜깁기된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며칠 전엔 총리실도 ‘보도가 악의적으로 왜곡됐다’면서 누리집에 3개 동영상 풀텍스트를 올렸다. 그러나 동영상을 본 누리꾼들은 다수가 정반대 반응을 보이고 있다. 도리어 문 후보자의 ‘친일·식민 사관’을 재확인했다며 “무엇을 왜곡 편집했다는 건가”라는 반응인 것이다.


 말이나 글에서 인용은 괜히 하는 게 아니다. 자기 생각을 뒷받침하거나, 반대로 자기와 다른 생각을 비판하려 할 때 한다. 문 후보자의 경우 윤치호의 일기 내용이 평소 자기 생각과 잘 맞기 때문에 인용한 것임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 그의 다른 강연 동영상에는 윤치호가 “비록 1938년 이후에 몇 년간 친일을 했지만 그래도 이 사람은 기독교를 끝까지 가지고 죽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대목도 나온다. 그가 윤치호나 이승만을 ‘믿음의 선조’라고 부르며 뼛속 깊이 존숭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도 있다.


 문 후보자가 장로로서 교회란 특수 공간에서 한 발언이란 사실도 면책 근거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이 동영상이 옳은 그르든 자기 나름으로는 진실된 신앙에 기초한 생각들을 그대로 담은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그 뜨거운 신앙을 바꾸라고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강연에서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일제 식민지도, 분단도 그렇다고 한다. “(하나님이) 6·25까지 만들어 주셨어요”라고 말한다. 입만 열면 “하나님의 뜻”이다. 동영상과는 별도로 그는 한 기독교 선교방송에선 “때가 되면 하나님의 섭리로 북한이 무너지리라고 확실히 믿는다”며 북한과 협상이나 대화는 필요없다는 소신도 밝힌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이런 것을 단순히 교회 내부용 발언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아주 순진한 생각이다. 신앙은 철학을 뛰어넘는 고귀한 무엇이다.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 점에서 그의 발언은 진심을 담은 전인격적 행위였다.


 나는 2010년 8월 ‘신앙과 독선 사이’란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거기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 대해 “그의 통치행위와 정책에서 드러나는 독선적 모습이 신앙과 어떤 관계가 있지 않나. 혹시 신앙이 독선을 부추기지 않았을까”란 질문을 했다. 그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특히 4대강 사업에서 매우 독선적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칼럼에서 9·11 테러 후 세계를 선과 악, 동지와 적으로 나눈 부시 미국 대통령의 극단적 이분법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명했다. 그의 단순 사고구조에도 근본주의적 기독교관이 깔려 있었다. 증거도 없이 이라크를 침략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데도 필시 이 기독교 근본주의적 선악관이 작동했다.


 나는 문 후보자에게 그토록 확고한 신앙을 내려놓으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그러라고 한들 그가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확신이든 광신이든 민주국가에서 신앙은 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이 말만은 분명하게 해야 겠다. 신정국가라면 모를까 세속국가 대한민국의 총리로는 절대 결격이다.

Posted by 김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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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곳에서 시차를 두고 열린 행사 두 개로 시작하자. 장소는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이었고, 두 행사 모두 민주주의와 직결된 것이었다. 독립공원이 생소하다면 서대문 형무소 자리 하면 단박에 알아들을 거다. 독립공원은 1987년까지 서대문 형무소가 있던 자리에 조성됐다.


 지난 11일 이곳에서 ‘갑오년 새해, 민주주의를 구하라’는 이름의 시국대회가 열렸다. 요즘 시국 집회가 흔하지만 이날 모임엔 특색이 있었다. 이른바 ‘민주화 세대’의 중장년층 시민들이 새해 첫 시국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여기엔 1만3451명이 연명했다. 이철 전 코레일 사장, 원혜영 민주당 의원 등 유신시절 민주화 운동 경험이 있는 인사들이 나왔다. 20여개 대학 민주동문회 회원 등 500명 가량이 모였다.


 왜 모였나. ‘민주주의를 구하라’는 대회 이름대로다. 민주주의의 위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국선언에서 “수많은 국민의 피와 땀과 눈물로 지켜왔던 민주 정통성이 위태로운 상황”이라고 했다. 또 “이 참담한 민주파괴 현실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성명은 끝에 “유신독재정권의 망령이 되살아난 듯한 착각마저 든다”고 썼다. 이 시대에 ‘유신독재정권의 망령’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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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1일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갑오년 새해, 민주주의를 구하라’는 시국대회를 연  대학

민주동문회 회원 등이 서울광장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지난해 5월 24일 독립공원 내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이름하여 ‘10·26 의인들 33주기 합동추모식’이 열렸다. 1979년 10·26 때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 부하 등 6명을 추모하는 자리였다. 왜 여기서 열었나. 1980년 5월 24일 이들의 교수형이 집행된 곳이다. 현역 대령이었던 김재규의 수행비서관 박흥주만 단심이 적용돼 이보다 앞서 3월 6일 총살형됐다.


 두 행사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앞에 말했듯 둘 다 민주주의와 직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민주화 세대가 볼 때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다. 시국선언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출범 1년도 채 되지 않은 박근혜 정권이 쉴 새 없이 저지르고 있는 민주파괴, 공약파기, 민생파탄의 만행에 의해 처절하게 유린당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데 김재규가 저지른 10·26은 민주주의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굉장히 있다. 김재규는 유신헌법이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위한 헌법이며 이는 자유민주주의를 말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979년 12월 18일 법정 최후진술 등을 통해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래서 “야수와 같은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말했다. “공산주의와 대결하려면 더 철저한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 독재를 가지고는 이길 수 없다”는 소신도 피력했다.


 이 글은 김재규를 재평가하려는 목적이 아니지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김재규가 당시 군검찰 기소 내용이나 세간의 추측대로 정권욕에 사로잡혀 ‘대역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란 점이다. 그는 민주주의에 대한 나름의 소신과 철학을 갖고 있었다. 그의 소신을 정리하면 이렇다. “유신은 민주주의와 상극이다. 유신체제를 끝내기 위해서는 접근이 쉬운 내가 박정희를 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집권을 하면 또 다른 군부독재가 되기 때문에 집권을 계획하지는 않았다. 나는 기쁘게 가니 국민 여러분은 자유민주주의를 꽃피우고 편안히 사시라….”


 그러나 오늘의 정치현실은 그의 바람과는 거꾸로 가고 있다. 그가 사망한지 33년 세월이 흘렀건만 유신시대 민주화 투쟁을 한 인사들이 유신독재의 망령 부활을 탄식하는 시국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쉽게 민주화를 입에 올린다. 하지만 지난 시절 어떻게 이룩한 민주화던가. 유신 시절 김지하는 피를 토하듯 ‘타는 목마름으로’를 노래했다. 그 목마름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신새벽의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타는 목마름으로

                                일러스트 권신아

 

 

 두어달 전 나온 김재규 평전 <바람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는 박근혜 시대에 다시 읽는 김재규다. 작가 문영심은 서문에 이렇게 썼다. “지금 김재규가 누구인지 다시 묻는 이유는 유신의 악몽이 우리 머리 위에서 되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실로 박근혜 정권은 여러가지 점에서 유신의 망령, 악몽을 떠올리게 만든다. 국정원의 선거개입, 그 진상 은폐 축소 조작,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무단 공개, 검찰총장과 검찰 특별수사팀장 찍어내기, 민노총 침탈 등 노동기본권 유린, 공영방송 장악을 통한 여론조작, 기초노인연금 등 대선공약 파기, 수서발 KTX주식회사 설립 강행…. 40년 전 유신 때 등장했던 국사 국정교과서를 부활시키려 한다. 거기에다 대통령은 “과거 불법으로 떼쓰면 적당히 받아들이곤 했는데, 이건 소통이 아니다”며 불통정치를 계속 할 태세다.


 이런 일들을 유신 시절과 연결짓는 건 자연스럽다. 반민주성에 있어서 전임 이명박 정권과 초록동색이란 이유로 박근혜 정부를 ‘이명박 정권 6년차’라 조롱하기도 한다. 그러나 순진한 생각이다. 박근혜에게는 독재의 원체험, 바로 박정희란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작년 3월 쓴 ‘유전자 정권’이란 칼럼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전자가 이 정권의 성격과 정체성을 두고두고 규정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를테면 독재의 유전자 같은 것 말이다. 설마 했지만 1년도 채 안 지나 그 우려는 사실로 판명나고 있다. 정권에 유신독재의 원체험이 있다면, 그 반복도 별로 거리낄 게 없는 일이 된다. 더욱이 그 때를 미화하고 부친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어하는 ‘유신공주’가 대권을 잡고 있는 마당이다.


 주요 대선공약들을 거의 다 파기한 박근혜 정권의 기만성도 태생적인 것으로 본다. 박정희는 유신을 한다며 ‘한국적 민주주의’란 대사기를 쳤다. 일찌기 정치학자 전인권 교수는 민주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의미에서 박정희를 몰(沒)민주주의자 또는 무(無)민주주의자로 규정했다. 박근혜는 그런 부친을 지금도 ‘선배이자 스승이며 나침반과 같은 존재’로 존숭한다. 민주주의를 학습할 기회가 적었던 박근혜가 그 소중함을 알리라 기대하기도 어려운 이유다.


 따라서 이 나라 민주주의의 전망은 매우 어둡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방안으로 결선투표제 도입이나 4년 중임 또는 내각제 개헌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제도적 측면이다. 더욱 본질적이고 절실한 건 시민들이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자각하고 비판하고 연대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후퇴를 아파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정치개혁·정권교체 열망도 더 힘을 얻을 것이다. 그게 우리가 맞닥뜨려야 하는 ‘두번째 민주화’의 역설인지 모른다.

Posted by 김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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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잔인한 거다. 어째선가. 희망의 이름으로 현재의 고통을 유보하고 미래로 전가하기 때문이다. 그럼 현재 진행 중인 고통은 어쩌란 말인가. 서현이의 짧고 불행한 삶을 생각해도 그렇다. 지난 10월 ‘소풍을 가고 싶다’고 의붓엄마한테 말했다가 폭행을 당해 갈비뼈 16개가 부러지며 숨진 여덟 살 이서현양 말이다. 이 사건은 아동학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켰다. 시민단체들은 진상조사와 제도개선위원회를 만들었다. 국회에선 아동학대 처벌을 강화하는 특례법 제정이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죽은 서현이는 돌아올 수 없다. 내가 희망은 잔인한 거라고 말한 이유다. 서현이는 파란 꿈 한번 펼쳐보지 못한 채 떠나 그저 계기로, 교훈으로 남았다. 사람들은 다시는 비슷한 일이 일어나선 안된다며 미래의 희망을 말한다. 불쌍한 아이의 운명은 잊혀져 간다. 이 어찌 잔인하지 않은가.

어떤 사람에게 희망은 치유할 수 없는 질병, 불치병이다. 팔레스타인 시인 마무드 다르위시(1941~2008)가 그랬다. 2002년 3월 이스라엘의 공격이 벌어지는 팔레스타인에 파견된 국제작가회의(IPW) 대표단 앞에서 그는 감동적 환영사를 했다. “우리에겐 희망이라는 치유할 수 없는 병이 있습니다. 해방과 독립에의 희망 말입니다.” 그는 희망들을 열거한다. 자식들이 안전하게 등교하는 희망, 임신부가 군 검문소 앞에서 죽은 아기를 낳는 게 아니라 병원에서 산 아이를 낳는 희망, 시인들이 피가 아니라 장미에서 빨간색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될 날에 대한 희망….

 

 

덕수궁에서 정동길을 따라 걷다보면 캐나다 대사관 옆에 서 있는 수령 520년 회화나무를 만난다. 조금 더 가면 오른편으로 경향신문 건물이 나오. 정동길, 화화나무, 경향신문은 내 희망의 근거로 길이 남아 있을 것이다. 사진은 窓雨의 블로그에서 빌렸다.



나라 없는 팔레스타인 시인에겐 우리가 상상조차 못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 있다. 이처럼 인간은 잔인한 희망을 불치병처럼 앓으며 살아야 하는 존재다.

나는 올해 말 퇴직을 앞두고 마지막 칼럼을 쓰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름다운 지난 시절을 추억하며 회상에 잠길 겨를이 없다. 그보다는 비탄의 애가(哀歌)를 부르고 싶다. 너무도 어두운 시대적 현실 때문이다. 오래 언론에 몸담은 자로서의 부채의식도 발동한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된 데는 내 탓도 있다”는.

정치·경제·사회 상황은 절망적일 정도로 소통 불능, 양극화로 치닫고 있다. 대선에서의 부정을 비판하면 ‘대선 불복이냐’고 으름장을 놓고, 여차하면 종북으로 모는 일이 일상화한 시대다. 참으로 해괴한 제2 유신시대다. 지난 일요일 경찰이 경향신문사에 난입하는 사건이 터진 것도 공교롭다. 경찰은 파업 중인 철도노조 지도부를 검거한다며 신문 제작 중인 사옥에 난입해 12시간 동안 건물을 휘젓고 다녔다. 이것이야말로 박근혜 정권의 반노동, 반언론, 반민주성을 압축적으로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것은 단숨에 세월을 34년 전 YH사건 시대로 후퇴시켰다.

이튿날 박 대통령은 “당장 어렵다는 이유로 원칙없이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간다면 우리 경제, 사회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며 철도파업 강경대응 방침을 재천명했다. 이 모습에서 ‘철의 여인’ 대처를 떠올린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독선과 소신을 혼동하는 꽉 막힌 대통령을 본다.

그는 일전에도 “정부에서 누차 민영화 안 한다고 발표했는데 민영화하지 말라고 파업하는 것은 정부 발표를 신뢰하지 않는 일”이라고 했다. 민영화 논란을 떠나 말 자체가 웃긴다. 그는 지난 1년 동안 대선 때 한 경제민주화 등 공약들을 모조리 뒤집었다. 국민이 안 믿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그래놓고 대화는 일절 거부한 채 믿으라 한다. 그걸 믿는 쪽이 바보다.

그가 엊그제 한 말 가운데 눈길이 가는 건 ‘미래’란 단어다. 희망도 미래에 속하는 것이므로. 하지만 문법이 다른 듯하다. 이 불통 지도자가 희망하는 미래는 어떤 것인가. 유신시절의 국민총화 같은 것일까. 또는 종북 척결?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그건 국가적 재앙이다. 그러나 그가 생각을 바꿀 가망은 크지 않아 보인다. 이 정권의 태생적 유전자성과 기만성을 감안하면 그렇다.

그럴수록 우리는 희망을 호출해야 한다. 잔인한 일이긴 하다. 엄혹한 정치현실에서도 소망스러운 정치, 살맛 나는 세상을 희망하며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게. 그러나 이 희망은 혼자 가는 게 아니다. 함께 가야 하는 것이 있다. 그건 분노와 비판 그리고 연대다. 프랑스의 ‘낭만적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은 92세에 쓴 책 <분노하라>에서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고 했다. 분노는 의당 비판을 부른다. 세상천지가 분노할 것, 비판할 것들이다. 비판을 멈춰선 안된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는 소통과 연대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사람들은 전통적 대자보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결합해 서로의 안녕을 묻고 고민을 나누고 있다.

31년간 나를 품어준 정동 22번지 경향신문은 오래오래 내 희망의 근거로 남아 있을 것이다. 정동길 ‘방랑의 끝 나무’와 함께(캐나다 대사관 옆 520살 먹은 회화나무에 내가 붙여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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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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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ttalgi21.khan.kr 딸기 2013.12.26 15: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 칼럼, 잘 읽었습니다!!!

  2. 쿨티 2013.12.27 10: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년을 돌이켜보왔는데, 내적으론 많이 성장했는데, 회사에서는 크게 인정받지못했습니다. 어려운가운데에서 늘 희망을 가지고 1년을 보냈는데, 씁씁했습니다. 정말 현실은 바꾸기가 쉽지 않은것 같아요. 영화속 대사처럼"현실이 그렇게 말랑말랑한줄 아냐??"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생각을 해도 그것들은 다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고, 정답은 항상 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희망이 하잖게 느껴고, 또한 마취약처럼 취하고 있는것이 아닌지 물어봅니다. 오늘 곰곰히 생각해 봐야겠네요.

애국심은 거룩한 것이다. 그런데 영국 문필가 새뮤얼 존슨(1709~1784)은 “애국심은 악당의 마지막 도피처”라고 악담을 했다. 지금도 심심치 않게 인용되는 이 말은 왠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그러나 무슨 생각에서 이 말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앞뒤 맥락이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인즉 존슨이 이 말을 했다고 세상에 알린 사람은 그의 전기를 쓴 동시대인 제임스 보스웰이었다. 보스웰은 존슨이 비난한 건 전반적 애국심이 아니라 가짜 애국심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한편 사전 편찬자이기도 했던 존슨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자신이 만든 영어사전에 ‘애국자’에 대해 “가짜 주화를 가려내듯 외관만 그럴듯한 가짜 애국자를 가려야 한다”고 썼다. 애국자를 자처하면서 당파적 분란만 일으키는 행태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존슨이 뭘 말하려 했는지가 어느 정도 파악된다.

 

 

          영국 문필가 새무얼 존슨. "애국심은 악당의 마지막 도피처"란 유명한 언명을 남겼다.

 


애국심에 관해서라면 박근혜 대통령의 애국심을 의심할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아버지의 서거 소식을 듣고도 제일 먼저 한 말이 “전방은요”였다고 한다. 투철한 국가관·안보관이 몸에 배어 있음이다. 2006년쯤 김무성 당시 한나라당 의원에게 어떤 기자가 “왜 박근혜 전 대표를 지지하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은 “정치인 가운데 박근혜만큼 애국심이 깊은 사람은 없다”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이 재미있다. “MB는 한참 뒤떨어진다. 자기 생각만 하고 산 사람 아닌가.”

김 의원의 말이 아니더라도 박 대통령은 정말 나라 생각만 하고 사는 것 같다. 지난달 말 수석비서관 회의에서도 3년 전 연평도 사태 때 “휴가를 포기하고 복귀한 장병들의 애국심”을 치하했다. 안보를 지키는 데 무기보다 훨씬 중요한 건 “국민들의 애국심과 단결”이라고도 했다.

대통령이 뜨거운 애국심으로 단결을 호소하는데 나라는 왜 이리 분열로 치닫는 것인가. 답은 애국심 자체가 아니라 어떤 애국심이냐에서 찾을 수 있다. 존슨이 설파했듯 만약 가짜 애국심이라면 ‘악당의 마지막 도피처’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애국심의 독선성이다. 국정 운영이 독선·불통인데 나라사랑마저 자기만의 방식을 고집한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애국심은 결코 특정인이나 집단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애국의 길, 방법론은 여러 가지인 것이다. 그걸 인정하지 않고, “이것만이 애국”이라 외치는 독선적 애국심, 이를테면 ‘애국독점주의’는 때로 아주 위험하다. 남이 하는 애국은 애국이 아니고, 내 것만 진짜 애국이라는 독선은 자칫 독재와 파시즘으로 가는 길이다.

 

                          안중근 의사가 남긴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 유묵 



안중근 의사의 유묵 가운데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란 게 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1910년 뤼순감옥에서 순국하기 전 남긴 것이다.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며 애태운다”라는 글엔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위기를 염려하는 애국정신이 절절히 흐른다. 나는 이 휘호를 천주교 순교성지인 서소문 공원에서 처음 접했다(원본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있다). 경찰이 설치한 입간판 안보 포스터에 사용됐는데, ‘함께하는 안보의식 행복한 대한민국’이란 표어와 함께였다. 안 의사의 휘호가 천주교 성지에서, 하필 범죄·간첩신고 독려 표어에 쓰였다는 게 심한 부조화로 여겨지긴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안보 포스터로 적절하다는 게 경찰의 판단인 것을.

민주주의는 생각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데서 출발한다. 저 사람이 추구하는 애국적 가치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인정해 주는 거다. 애국심이라고 해서 무슨 금단의 성역이 아닌 것이다.

박정희는 1940년 23세 때 교직을 팽개치고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해 충직한 일본제국의 군인이 된다. 장준하는 1944년 26세 때 일본 학병을 탈출해 중국군 유격대에 가담하면서 독립운동가로 나선다. 지금 새삼 두 사람의 인물론을 펴려는 게 아니다. 둘의 운명은 결국 독재자와 민주투사로 갈렸지만 다카키 마사오 생도를 움직인 것도 긴 안목으로 본 애국의 길이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지금 급속히 공안시대로 가는 것을 두고 여러 갈래 분석이 가능하지만 이 애국적 가치에 대한 편협한 이해가 중요 원인이 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국가안보를 지킨다는 명분 아래 공안시대 종북몰이를 정당화하는 데 애국심이 동원되는 것이다. 9·11 테러 후 미국이 제정한 패트리엇법(애국자법)은 무제한적 개인정보 접근을 허용하는 등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 위협이란 비판을 받았다. 긴 법이름의 두문자를 딴 이 법은 미국인들의 애국심을 결집하자는 의도였지만, 오도된 애국의 전형적 사례로 비판받았다.

 

실로 애국자들이 넘쳐나는 공안시대다. 대통령의 애국심이 전염성이 강한 탓에 소나 개나 애국을 부르짖는 것 같다. 그럴수록 찬찬히 살펴보고 진짜와 가짜 애국심을 헷갈리지 말아야 한다. 예리한 감식안이 필요한 이유다.



김철웅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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