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파병과 사무라이의 칼
입력 2003.12.14 19:22
지난주 일본 언론은 자국정부가 자위대를 이라크에 파병키로 결정한 데 대해 극과 극의 반응을 나타냈다. 해외 전투지역에 대한 사상 최초의 자위대 파병 결정인 만큼 논란이 분분할 수밖에 없었다. 진보적인 아사히신문은 ‘일본의 길을 오도하지 말라’는 제목의 사설을 이례적으로 1면에 게재해 반대입장을 분명히했다. 반면 우익지인 요미우리는 ‘국민의 정신이 시험받고 있다’는 사설에서 이번 결정을 ‘역사적 결단’이라고 극찬했다. 정치권에서도 뜨거운 찬반논쟁이 재연됐다. 민주당은 이 결정을 1941년 도조(東條)내각의 대미 개전 결정에까지 비유하며 철회를 요구했다.
파병논쟁은 한국에서도 계속되고 있고 찬성과 반대의 논리 역시 엇비슷하다는 점에서 양국은 어찌보면 동병상련의 입장에 있다. 그런 만큼 한국 언론은 일본의 이라크 파병 결정과 논쟁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추측컨대 매사를 ‘미국·일본 등 선진국’과 비교하고 감탄하려드는 일부 인사들은 일본의 결정에 대해 부러움마저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나 다를까. 파병을 결정한 고이즈미 총리를 ‘정치생명을 건 용기있는 지도자’로 치켜세운 신문도 있었다.
이런 해괴한 심리적 동조 현상은 꾸준히 반복되어왔다. 2002년 9월 북·일정상회담에서 일본이 북한으로부터 자국민 납치문제에 대한 사과를 받아냈을 때 한국의 보수언론이 보여준 (일본에 대한) 감탄과 (한국에 대한) 부끄러움의 토로가 그런 것이다.
-對美 동맹강화 우선 꼽아

그러나 오늘의 문제는 이런 몰주체적 단순 사고 이상의 것이다. 즉 일본의 전투지역 파병 결정의 본질, 곧 발빠른 우경화·군사대국화의 움직임을 제대로 보고 있느냐는 문제이다. 하지만 명분 없는 전쟁에 파병을 추진하고 있는 한국 정부와 전투병 파병을 줄기차게 주장해온 보수언론은 일본의 파병 결정에 대해 꿀먹은 벙어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중국의 관영 신화통신이 일본이 파병을 결정하자 즉각 반응하면서 전후 방위정책의 일대 전환점이라고 지적하고 군사대국화를 경계한 것은 우리와 크게 대비됐다.
아사히신문의 후바나시 요이치 대기자는 이런 맥락을 잘 짚었다. 그는 지난 10일 중앙일보 기고를 통해 파병과 관련해 두 나라가 갖고 있는 공통점으로 파병목적을 꼽고 그것은 바로 미국과의 동맹유지·강화라고 규정했다. 한·일이 과거 소말리아와 캄보디아에서 파병 성공신화를 갖고 있다거나 국민의 70∼80%가 파병에 반대하는 것도 공통점이다. 굳이 차이를 들자면 한국전쟁을 경험한 한국의 중·장년층이 파병을 지지하는데 반해 2차대전을 겪은 일본 중·장년층은 파병에 본능적으로 반대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그는 지적했다.
출발부터 완벽하게 잘못된 전쟁에 군대를 보내면서 경제·안보상의 국익이나 인도적 고려 등 구구한 이유를 달기보다 미국과의 동맹강화란 현실적 목적을 강조한 것은 차라리 솔직해 보인다. 이런 파병은 어차피 미국이 일방적으로 시작한 전쟁에 끌려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동병상련적 측면이 비판적 시각을 가린다면 문제다. 일본은 미국의 압력 수용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이라크 파병을 자위대의 역할 확대와 국제적 위상강화의 호기로 삼으려는 의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일본 안에서는 이라크에서 미국을 도와주는 대신 북한문제에서 발언권을 높이려는 것이 파병 결정의 진짜 목적이란 분석도 나왔다. 한 자위대 간부가 최근 북한의 도발위협에 대해 “우리는 사무라이의 후예”란 말로 결기를 보였다는 얘기도 들린다.
-군사대국화 움직임 간과-
지난 세기 일본의 위정자들이 국가를 군국주의의 열기로 몰아넣었음을 기억하는 상당수 일본 성인들은 사무라이 정신의 미화를 경계한다. 그러나 700년 동안 일본을 지배했던 무사계급 사무라이의 전통은 현 일본사회에 살아있다. 사무라이 영웅담은 지금도 가부키와 영화의 주요 소재이다. 주말이면 사무라이 복장으로 옛날의 유명 전투장면을 재현하는 행사가 곳곳에서 벌어지는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인의 양면성에 대한 분석은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 고전적 명저다. 베네딕트를 원용해 표현한다면 일본의 이라크 파병은 ‘평화’의 이름으로 ‘사무라이의 칼’을 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일본의 파병 결정을 미·일 동맹 강화나 반전 평화운동 차원에서만 볼 수 없는 이유다.〈김철웅/미디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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