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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칼럼

철탑 농성이 남의 일이 아닌 까닭

이봉조가 작곡하고 현미가 부른 옛날 노래 ‘몽땅 내사랑’(1967년)의 가사가 재미있다. “길을 가다가 사장님 하고 살짝 불렀더니/ 열에 열 사람 모두가 돌아보네요/ 사원 한 사람 구하기 어렵다는데/ 왜 이렇게 사장님은 흔한지 몰라요/ 앞을 봐도 뒤를 봐도 몽땅 사장님….”

당시 사회 경제가 얼마나 ‘사장님 양산 체제’였길래 이런 노래가 나왔는지는 알 수 없거니와, 이 가사를 이렇게 바꿔보고 싶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몽땅 비정규직”으로. 우리는 그만큼 비정규직 많은 나라에 살고 있다. 심지어 사회적 약자를 돌봐야 하는 사회복지사도, 고용노동부 고용안정센터의 직업상담원도 태반이 비정규직이다.

 

현대차 울산공장 앞 송전철탑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 2명도 비정규직이다. 이들은 회사에 불법파견을 인정하고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오늘로 15일째다. 지금도 파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두 노동자가 철탑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지난 17일 밤부터 현대차 울산공장 명촌중문 앞 송전탑에서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천의봉(위), 최병승 조합원.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 행동이 남의 일이 아니란 생각이 강렬해진다. 왜 그런가. 세상은 경제민주화 구호·담론으로 시끌벅적하다. 경제민주화의 방법론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핵심에 속하는 게 바로 비정규직 문제다. 고용이 불안정하고 차별이 심한 비정규직은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우리는 결혼, 적금, 출산, 집장만 등 생활의 꿈을 꾸고 미래를 계획하면서 삶의 재미를 느낀다. 그런데 당장 몇 달 후에 실직할지 모르는, 다시 일자리를 잡을 수 있는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어떤 미래를 계획할 수 있겠는가. 비정규직은 노동자의 미래를 빼앗는다.”(장귀연 지음, <권리를 상실한 노동자 비정규직>) 꿈, 재미, 미래를 박탈당한 비정규직의 처지를 타개하는 것이야말로 경제민주화의 본질이다.

또 하나 이들 문제가 남의 일이 아닌 이유는 비정규직의 보편성이다. 비정규직은 정말 많다. 통계상 2010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한국의 임시직 노동자 비율은 24.8%로 세 번째다. 폴란드(27.3%), 스페인(24.9%)보다 낮은 걸로 돼 있다. 그러나 국가 간 비정규직 비교는 그리 간단한 게 아니다. 가령 이 통계엔 시간제와 장기 임시 일용직이 빠졌기 때문에 이걸 넣으면 우리 비정규직 비율은 48%로 뛴다. 줄잡아 800만~850만명이 비정규직이다.

같은 비정규직 노동이라도 질적 차이가 크다. 우리 비정규직 급여는 정규직의 절반도 안된다. 게다가 많은 OECD 국가에서는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반면 여긴 정반대다. 한번 비정규직이 되면 좀체 벗어나기 어렵다. 철탑에 올라간 해고노동자 최병승씨(36)가 그 경우다. 최씨는 2005년 현대자동차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파업에 참가했다 해고된 후 7년의 소송 끝에 지난 2월 대법원에서 “현대차의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며 2년 이상 일한 사내하청 노동자는 원청회사가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확정판결을 받아냈다. 중앙노동위에서 복직 결정까지 받았다. 그러나 회사가 다시 행정소송을 제기해 복직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아 답답한 심정으로 이렇게 올라왔다”고 말한다.

흔히 연대의 의미로 “우리는 모두 ○○○다”란 표현을 쓴다. 9·11 테러 때 르몽드의 콜롱바니 주필이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다”란 말로 미국에 대한 연대를 표명했듯. 필자도 외국인 불법체류자에 대한 마구잡이 단속 때 “우리는 모두 외국인이다”라거나, 아서 밀러가 별세했을 때 그의 걸작 <세일즈맨의 죽음>을 기리며 “우리는 모두 세일즈맨이다”란 글을 썼다. 여기에 “우리는 모두 비정규직이다”를 추가하고자 한다. 비정규직이 나와 당신, 그리고 사랑하는 내 쌍둥이 딸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의 현재, 또는 미래의 모습일 개연성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철탑 위 그들을 타자화할 수 없는 이유가 또 있다. 천의봉 비정규직 노조 사무국장(31)은 며칠 전 ‘철탑일기’에 이렇게 썼다. “잠깐 후회를 해본다. 술 먹으면서 병승이 형이랑 송전탑에 오르기로 약속했던 그 날을.” 한국시리즈를 하는데 야구장 가서 쌓인 스트레스나 풀면 좋겠다고도 했다. 이건 ‘철탑마저 투쟁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강경 투사의 모습과 거리가 있다. 그저 “당당히 정규직 쟁취해서 편히 살게 해드릴게요”라고 어머니께 다짐하는 효자다.

대선 후보들은 이들의 철탑 농성이 경제민주화와 결코 무관한 게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경제민주화는 구체적이어야 한다. 마침 엊그제 이채필 고용노동부 장관이 “현대차가 대법원 판결을 따르지 않는 것은 유감스럽다”고 비판했다. 불법파견 근로자에 대해 직접고용을 하지 않으면 법정 최고액의 과태료를 부과하겠다고도 했다. 그런데 별로 후련하지 않다. 엄포에 그칠 거란 경험칙 때문이다. 얼마 전 제프리 삭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새누리당 경제민주화실천모임 초청 간담회에서 재벌개혁 문제에 대해 “정부가 재벌을 규제하지 않으면 재벌이 정부를 인수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