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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칼럼

굿바이 티나

20년 전 필자의 러시아 여행에 대한 회상으로 시작하자. 모스크바대 연수 중 훌쩍 떠나온 크림반도 심페로폴의 카페에서 귀에 익은 팝송이 흘러 나왔다. 메리 홉킨의 ‘도즈 워 더 데이즈(Those Were The Days)’였는데, 보컬 그룹이 러시아어로 부르고 있었다. 동행한 러시아 친구에게 “팝송을 러시아어로 부르네”라고 했다가 면박을 당했다. 이 곡은 원래 러시아 노래 ‘다로고이 들린노유(머나먼 길)’였다. 메리 홉킨이 1968년 번안해 불러 유명해진 것이다.

원곡도 애절한 사랑의 추억에 관한 것이었지만, 번안한 가사도 썩 훌륭하다. 18세 웨일스 시골뜨기 소녀를 일약 세계적 스타로 만든 것은 청아하고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함께 가슴에 절절하게 와닿는 노랫말일 것이다. 결코 끝날 것 같지 않던 행복한 젊은 시절에 대한 회상의 노래다.

“Those were the days my friend/ We thought they’d never end/ We’d sing and dance forever and a day/ We’d live the life we’d choose/ We’d fight and never lose/ For we were young and sure to have our way(내 친구여 그런 날들이 있었지/ 우린 그 날들이 영원하리라 생각했지/ 우린 늘 노래하고 춤추며 지내리라/ 선택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싸우고 지지 않으리라/ 왜냐면 우린 젊어서 자유롭게 살 수 있으리라 믿었던 거야)”

이제 영국 총리를 11년 반 동안이나 지낸 마거릿 대처를 회상할 차례다. ‘철의 여인’과 ‘대안(代案)은 없다’는 뜻의 ‘티나’로 불린 그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정치인이었다. 다만 그 변화가 소망스러운 것인지에는 견해가 극명하게 엇갈린다. 이 점에 대해서는 가디언이 지난 11일 ‘마거릿 대처: 역사의 초고(初考)’란 사설에서 정확하게 짚었다. “사람들은 모두 고인에 대한 회상을 아주 제멋대로 선택하는데, 거기엔 자기가 강조하고 싶은 관점이 강하게 작용한다.” 이 때문에 그의 정치적 공과에 대한 논란이 사후에 뜨겁다.

 

8일 타계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를 커버스토리로 다룬 이코노미스트 13일자. 대처를 '자유의 전사'로 호평했다.

 

 

공(功) 쪽에 강한 무게를 실은 언론은 이코노미스트다. 이 잡지는 13일자에서 “그의 민영화에 대한 열정은 지구적 혁명을 촉발했고, 독재에 대한 반감은 소련의 종말에 기여했다. 처칠은 전쟁에서 이겼지만 ‘이즘’을 만들진 못했다”며 평시 지도자로서 대처리즘을 통해 세계를 바꾼 그의 삶을 기렸다. 이코노미스트는 그의 개혁이 최근 경제위기들의 씨앗을 뿌렸다는 지적이 있다면서도 그럴수록 국가가 번성하려면 정부가 전면에 나서는 것을 억제해야 한다는 대처의 중심사상에 매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장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이코노미스트가 이렇게 대처의 보수주의를 옹호한 반면 수많은 영국 진보 언론과 논객들은 과(過)를 앞세운다. 가디언은 “대처의 유산은 인간 정신을 파괴한 사회분열, 이기심, 탐욕”이라고 지적했다. 켄 리빙스턴 전 런던 시장은 “대처는 영국이 오늘날 직면한 모든 문제에 책임이 있다”고 비판했다.

나는 여기에 그가 한 시대의 획을 그은 정치인이란 사실을 추가하고 싶다. 달리 말해 대처 이전과 이후 시대가 너무나 확연히 구분돼 그의 시대 이전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해졌다는 뜻이다. 이 판단은 메리 홉킨이 ‘그런 날들이 있었지’라고 회상한 노랫말과 통하는 구석이 있다. ‘도즈 워 더 데이즈’의 ‘우리’가 행복한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이유는 다름 아닌 세월 탓이다.

대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도즈 워 더 데이즈’의 세월보다,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게 있으니 바로 시장만능주의, 좀 점잖은 말로 신자유주의다. 물론 대처는 어감이 상서롭지 못한 이 말을 쓰지 않았다. 대신 보수주의, 자유로운 기업활동이 보장되는 자본주의란 말로 자신의 강력한 공공부문 민영화, 노동시장 유연화, 노조 분쇄, 반복지 정책을 밀어붙였다. 그가 돈과 효율성을 가치로 떠받들어 부자들의 천사이자 빈자들의 마녀로 불리는 이유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1979년 영국, 1981년 미국에 신자유주의를 추종하는 정권이 수립된 데는 역사적 필연성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지금 여러 차례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시장의 실패와 탐욕을 다스리기 위한 대안 모색이 활발하다. 당연히 신자유주의 열기는 수그러든 지 오래다. 한데 대처의 사망을 계기로 그와 박근혜 대통령을 비교하면서 롤모델로 삼으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생뚱맞고 부적절한 일이다. 21세기에 청산해야 할 20세기로부터의 유산인 신자유주의의 화신을 본받으라니. 대단한 시대착오이자 시대정신의 외면이다. 행여 이런 분위기가 경제민주화와 복지 강화가 성장을 걷어차는 꼴이란 식의 성장지상론 정당화에 이용된다면 우려스럽다. 진주의료원 사태의 본질도 돈과 시장만으로 풀 수 없는 공공의료의 문제다.

거두절미하고 그때의 영국과 지금의 우리를 단순비교하려는 건 어리석다. 청와대 비서진들이 대처 연구에 몰두한다는데 이것도 쓸데없는 일이다. 그저 ‘티나’의 명복만 잘 빌어주는 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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