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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구호가 된 ‘창조’

예견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박근혜 정부 8개월 동안 ‘창조’ ‘창의’라는 이름이 들어간 정부 조직과 직위가 70여개 신설됐다고 한다. 민주당 최재천 의원이 엊그제 밝힌 바다.

정부 모든 부처 20곳에 창조행정담당관, 창조기획재정담당관, 창조행정인사담당관이 생겼다. 기존 명칭에 ‘창조’만 붙인 것이다. 창조경제 주무부서인 미래창조과학부에는 창조경제기획담당관, 창조경제기반담당관, 창조경제진흥팀이 신설됐다. 안전행정부에는 창조정부전략실, 창의평가담당관, 창조정부기획과가 생겼다. 산업통상자원부에는 창의산업정책관과 창의산업정책과가 신설됐다. 교육부에는 창의교수학습과, 병무청에는 신병역문화 창조추진단, 농촌진흥청에는 미래창조전략팀이 등장했다.

 

지난해 10월 18일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가 과학기술과 정보기술(IT) 기반의 일자리창출 전략이라는 '창조경제론'을 발표하고 있다. 그 개념은 아직도 안개 속이다.

 


나열하다 보니 어지럽다. 창조경제를 표방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뜻대로 뭘 해보겠다는 건 알겠는데 기계적으로 창조, 창의를 갖다붙인 느낌이다. 그래서 미래부는 창조경제기획담당관의 업무가 ‘창조경제 관련 기본계획 수립·조정’ 등이고, 교육부는 창의교수학습과의 일이 ‘창의적 교육운영에 관한 기본정책안 수립·시행’ 등이라고 설명을 해도 도무지 아리송하다.

대통령의 뜻을 각 부처가 일사불란하게 받드는 걸 뭐랄 순 없다. 해당 부서들만큼은 자기 업무를 숙지하고 있을 수도 있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 생각해봐야 할 다른 문제가 있다. 첫째, 창조가 슬로건·구호가 되는 순간 창조는 사라진다. 구호와 창조는 상극이다. 창조·창의 붙은 부서가 봇물인 건 상명하복적 조직논리의 소산인 듯한데 이거야말로 창조든 창의든 거리가 멀다. “창조해” “창의력 갖고 와”라고 닦달해서 이뤄지는 것은 없다. 창의력 있는 기사(記事)도 마찬가지다. 녹색을 비롯해 이명박 전 대통령이 내놓은 실용, 중도, 법치, 공정 등 숱한 구호들은 어떤 운명을 맞았던가.

둘째, 그래도 꼭 구호를 써야 한다면 쉬워야 한다. 정치판에서든 시장에서든 슬로건은 내용·표현이 단순한 게 좋다. 그 점에서 새마을운동은 딱 와닿는 ‘잘살아보세’ 구호라도 있었다. 한데 창조경제는 여기에서도 결격이다. 창조란 말은 앞으로도 계속 우리를 추상성의 미로에 가둬놓을 거다.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덕지덕지 붙어 있는 창조·창의를 떼버리는 거다.


김철웅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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