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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외교적 결례

1994년 9월 미국 방문을 마친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전용기가 귀국길에 아일랜드 샤논 공항에 기착했다. 공항에서 앨버트 레이놀즈 아일랜드 총리와의 회담이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1시간이 넘도록 옐친은 비행기에서 내리지 않았다. 러시아 측은 ‘대통령이 깊이 잠들었다’고 해명했으나 나중 밝혀진 바로는 보드카를 너무 마셔 곯아떨어진 탓이었다. 옐친 주벽에 관한 전설적 얘기다. 하지만 외교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결례였다. 공항엔 군악대의 팡파르 속에 아일랜드 총리 부부와 각료 등 10여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끝내 정상회담은 못 이뤄졌다.

국가 간에도 외교적 예의를 갖추는 건 매우 중요하다. 이걸 전문적으로 ‘국제예양(禮讓)’이라고 한다. 가령 국가의 대표자에 대한 경칭, 회합 때의 좌석순 같은 것으로, 이를 어기는 게 국제법 위반은 아니라 해도 위신 실추를 면할 수 없다. 개인 사이도 그렇거늘 국가 간에 지켜야 할 예의를 어겨 상대국을 불쾌하게 만들고 상처 입혀서 좋을 게 뭐 있겠나.

 

 

보리스 옐친

 

황우여

 

외교적 결례는 국가 간 공방으로 번지기도 한다. 한국과 일의대수(一衣帶水)인 일본 사이에 그게 빈번하다. 재작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전격 방문 뒤 벌어진 친서공방 같은 것이다. 일본은 노다 총리의 서한을 우리 측에 발송하자마자 우리 정부가 이를 확인하기도 전에 외무성 홈페이지에 그 내용을 공개했다. 한국은 이걸 외교적 결례라고 보았다. 일본은 우리가 이 서한을 반송키로 하자 거꾸로 ‘외교관례상 있을 수 없는 결례’라고 맞받아쳤다.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가 외교적 결례를 범했다는 구설에 올랐다. 지난 추석 연휴기간 몽골을 방문해 차히아긴 엘베그도르지 대통령 등을 만날 예정이었으나 일정 조율 실패 등을 이유로 출발 당일 전격 취소한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그러자 ‘강대국에도 그랬겠느냐’ ‘몽골 등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파트너인데 여당 대표가 힘 약한 나라라고 그럴 수 있나’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외교는 총성없는 전쟁이라고 한다. 또 외교는 외교관에게만 맡겨놓을 일이 아니다. 민간외교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한데 황 대표의 처신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게 ‘지도층’ 인사들이 뻑하면 꺼내는 국격 손상의 문제 아닌가. 공항 정상회담까지 취소한 옐친급의 결례는 못된다 치더라도.



김철웅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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