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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공안몰이 속 이색판결

이석기 의원 사건부터 교학사 국사교과서 역사 왜곡 논란에 이르기까지 빠지지 않고 끼어드는 것이 공안(公安)이란 개념이다. 공안은 원래 ‘공공의 안녕과 질서가 편안히 유지되는 상태’라는 한가한 뜻이지만, 다른 단어들과 결합하면 사뭇 살벌해진다. 공안사건, 공안정국, 공안몰이, 공안탄압 등 용례가 그렇다. 시국(時局)이란 말도 비슷하다. ‘현재 당면한 국내 및 국제 정세나 대세’란 뜻이지만 시국사건, 시국선언은 뭔가 국가적으로 중차대한 일이 벌어진 것과 관련된다.

바야흐로 공안정국에 공안몰이의 전성시대 같다. 학생이 대학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가르치는 강사를 국정원에 신고했다. 고려대가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의 강연이 열릴 강당 대관을 정치적 편향성을 이유로 거부했다. 이 학교에선 한 학생이 트위터에 교내 성추행 사건에 대한 의견을 올렸다가 간첩·종북세력으로 몰리기도 했다고 한다.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가 9일 고려대 민주광장에서 국정원 선거개입과 관련해 공개 강연을 하고 있다. 고려대측은 정치적 편향성을 이유로 당초 강연예정이었던 고려대 4.18기념관의 대관을 취소해 논란을 일으켰다. /서성일 기자



교학사 국사교과서 저자 이명희 교수가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고 했다”고 근거없는 주장을 한 것도 대단한 공안몰이다. 이 공안몰이란 게 본질상 사실과 논리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는 “우리나라 대통령까지 지낸 분이 대한민국 설립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란 해설까지 곁들였다. 하지만 그 발언의 시기와 장소에 대해선 “정확하게 기억을 못하겠지만 2006년쯤으로 안다”고 했다. 역사학자가 아니라 상상력이 뛰어난 작가 같다. 적의 위험성을 과장하는 게 파시즘이라는데 꼭 그 짝이다.

이런 시절에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무죄 판결이 나왔다. 법원이 엊그제 무죄를 선고한 노동해방실천연대 회원 4명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부정하고 국가변란을 선전 선동한 혐의로 기소됐다. 재판부는 “해방연대가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하더라도, 실제 의미와 내용을 따져보면 선거와 의회제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폭력혁명이나 무장봉기를 주장한다고 볼 명백한 증거도 없다”고 밝혔다.

워낙 공안몰이가 ‘대세’인 듯한 세상이다 보니 이례적이란 느낌마저 든다. 작금의 공안몰이 흐름을 탔다면 이런 좌파들은 추상같이 벌하는 게 맞을 텐데 안 그랬다. 혹시 판사들도 좌파라설까. 아닐 거다. 국가안보는 공안몰이가 아니라 이성과 논리로 지켜진다는 걸 알기 때문이리라.


김철웅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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