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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내일은 비

긴 장마 속에 김소월의 시 ‘왕십리’가 떠오른다.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여드레 스무 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시의 계절은 여름 장마철이다. 시인이 구태여 밝히지 않았어도 ‘(비가) 한 닷새 왔으면 좋지’라거나, ‘가도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란 구절이 그렇다. 하여 ‘모든 것이 비에 젖어 있는 왕십리’에서 우리는 시가 노래하는 이별의 정한에 공감한다. ‘한 닷새 왔으면 좋지’란 표현에 대해서는 엇갈린 해석도 나오나 보다. 하나는 “(이별 때문에 가슴 아픈데) 닷새 정도만 오면 됐지 왜 자꾸 오느냐”라는 거고, 다른 건 “기왕 올 거면 좍좍 닷새는 쏟아져라”란 뜻이라는 거다. 하지만 시인은 이 부분을 모호하게 남겨놓았다. 어떤 쪽으로 읽어도 좋다는 뜻일 터.

 

기상청이 발표한 2013년 7월 날씨(서울 중구). 23일 가운데 19일이 비온 날, 하루가 흐림, 사흘이 구름많음으로 나타나 있다. '내일은 비'란 말이 실감난다.

 


비만큼 사람과 가까운 자연현상도 없다. 사랑할 때 그리고 이별할 때 비처럼 절절히 다가오는 게 있을까. 당연히 비는 가요와 문학의 단골 소재다. 김광석의 ‘사랑했지만’도 비에 관한 노래인데, 접근법이 독특하다. “어제는 하루종일 비가 내렸어/ 자욱하게 내려앉은 먼지 사이로/ 귓가에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그대 음성 빗속으로 사라져버려…”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도 비는 중요한 설정이다. 소설 마지막은 “나는 병원을 떠나 빗속을 걸어 호텔로 돌아왔다”로 끝난다. 이 하드보일드 문체의 대가는 사랑하는 여인이 아기를 낳다 숨지는 비극적 장면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비는 비극, 허무, 죽음을 상징하지만 작가는 수십번 고쳐쓴 끝에 감정표현이 절제된 이 문장을 완성했다고 한다.

장마가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중부지방은 지난달 중순 장마가 시작된 이래 7월 들어서는 그제까지 거의 매일 비가 내렸다. 서울은 겨우 사흘만 갠 날씨였다. 일기예보에서 ‘내일은 비’란 말을 듣는 게 일상이 돼버린 셈이다. 거기에다 스콜현상 같은 국지성 호우가 잦아 가령 강남엔 비가 오고 다른 곳은 맑기도 했다. 모두 기후변화의 양태들이다. 기상이변에 따른 ‘극값’ 경신 빈도도 높아졌다. 잠시 주춤한 듯하지만 이번 장마는 다음달 초까지 계속될 거라 한다. 기왕 오는 비, 지루한 장마에 대한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 비 한번 시원하게 내린다, 더러운 것들 씻어버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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