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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집권하면…”

신문 같은 데서 접하게 되는 “집권하면”이란 말 다음에는 통상 공약(公約)적 언설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이런 식이다. “김대중 대표는 14일 국회 연설에서 ‘민주당이 집권하면 거국내각을 만들어 특정지역의 정당이라는 말이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면서 ‘집권하면 거국체제를 통해 1년 내에 정국을 안정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1992년 10월14일 신문 보도다.

같은 해 5월 이런 기사도 눈에 띈다. “정주영 국민당 대표는 12일 기자간담회에서 ‘자본의 집중을 막기 위해 재벌을 해체해야 한다’면서 ‘집권하면 1년간 유예기간을 거쳐 계열기업 간의 상호지급보증 등을 없애는 방법으로 재벌을 해체하겠다’고 말했다.” 보수인사들이 보기에 불온한 “집권하면”도 있긴 하다. 지난해 대선에서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는 “집권하면 미군 철수와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통한 통일을 실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새누리당 대선 캠프 종합상황실장 때 “집권하면 까고” 발언을 한 장본인 권영세 주중대사. 박근혜 대통령이 27일 베이징 서우두 공항에 도착하자 전용기에 올라 인사한 뒤 트랩을 내려오고 있다.

 

이번에 우리는 “집권하면”에 이런 통상적 용례를 벗어난 독특한 쓰임새가 있음을 보도를 통해 알게 됐다. 이른바 “집권하면 까고”란 용례다. 지난해 12월 권영세 새누리당 대선 캠프 종합상황실장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회의록 활용을 검토했고, 집권하면 공개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녹취파일이 공개된 것이다. 그가 “이거는 우리가 집권하게 되면 까고…”라고 한 말을 음미해보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말인즉슨 불법 유출된 정상회담 회의록, 즉 국가기밀을 입수해 주물럭거리며 때를 보아 폭로할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폭로의 정치적 효과 극대화를 노린 것이었을까. 국가기밀을 정치공작의 대상으로, 무슨 주물럭 고기처럼 여기는 듯한 기고만장, 겁없는 발상에 아연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선 “집권하면”의 용례들이 정치인의 정책 의지와 희망이 반영된 것이라면, 권 상황실장의 “집권하면”은 그 넉자만으로도 음모의 악취를 물씬 풍긴다. 어떻게 발상이 그쪽으로 튀었을까. 식당에서 지인들에게 한 말이라 해서 문제의 심각성이 떨어지는 게 아니다. 그런 발상이 여당에 체질화한 어떤 정서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중 대사로 발탁된 권 상황실장은 지금 한·중 정상회담을 수행하느라 바쁜 모양이다. 한 신문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집권하면 깐다”던 권영세 대사, 한·중 정상회담도 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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